지자체들, 준칙안에 터무니없는 규정 넣고 눈치만 보나

고경희 기자
고경희 기자

“저희도 불합리한 규정인 거 압니다. 하지만 국민권익위원회의 권고라서 어쩔 수 없어요.”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배치 시 과거의 법령 위반 기록을 명시하도록 규정한 관리규약 준칙안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의 담당 공무원은 기자에게 이렇게 해명했다.

사단은 경기도가 지난해 10월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 개정안을 공개하면서 시작됐다. 문제가 된 내용은 위·수탁관리 표준계약서에 추가하라는 다음 대목이었다. ‘주택관리업자는 관리사무소장을 배치하거나 변경할 때 배치 예정인 소장이 최근 ◯년 또는 종전 단지 관리를 수행하면서 야기한 공동주택관리법령 상의 위반행위를 고지해야 한다.’

당연히 주택관리사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개정안 내용은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를 다해도 위반행위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과태료 처분을 이유로 주택관리사의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직업선택의 자유와 생존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법적, 논리적으로 경기도가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과태료가 강력 전과라도 되는 양 기록을 공개하라는 건 다른 분야에서는 쉽게 보지 못하는 과도한 규제다. 경기도는 결국 최종 개정 준칙에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전시, 부산시 등이 내놓은 준칙 개정안에도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이들도 경기도와 똑같은 이유와 과정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내용을 집어넣고 눈치만 보는 듯하다.

지자체 공동주택 관리 담당 부서에 전화해 사정을 들어봤다. 지자체 내부에서도 권익위의 권고사항이 관리현장에 맞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준칙 개정안에 넣었을까. 당사자인 주택관리사로서는 황당해할 답변이 나왔다. 

“권익위 권고를 무시할 수 없어 일단 준칙안에 넣었다. 관리 관계자들의 반대의견이 있으면 그 의견을 반영하려고 했다.” 

만약 주택관리사들이 방대한 준칙 개정안에서 ‘소장의 법령 위반사항 명시’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해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거나 반대가 약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자체에서 알아서 빼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대로 개정 준칙에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소장의 법령 위반사항 명시’ 규정은 국민권익위원회가 권고한 사안이다. 권익위는 다른 아파트 단지에서 문제를 야기한 주택관리사의 관리사무소 취업을 막아야 한다는 취지로 입주자등에게 소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준칙을 개정하라고 지자체에 권고했다. 권익위는 “재산 관리인 성격인 소장이 입주자등에게 재산상 손해를 끼친다고 하더라도 입주자등이 고소, 고발을 하는 것 외에 변경이나 해임 등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권익위는 국민 민원을 반영했을 것이다. 국민 민원이 국민신문고로 접수되면 자동으로 각 부처에 전달된다. 권익위에 직접 제기한 민원이나 부처에서 1차로 해결하지 못한 민원은 권익위가 시정 권고, 의견표명, 조정 및 합의 등을 통해 해결한다. 권익위는 정책 권고안을 만들 때 민원 해결에만 골몰하지 말고 상대측의 의견도 제대로 들어봤어야 했다. 그래야 더 큰 민원을 예방할 수 있다.

전현희 권익위원장은 1년여 전 공공기관의 권익위 권고 수용률이 87.5%라고 소개했다. 그는 “권익위의 권고가 구속력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힘자랑을 했다. “강제력이 없지 않냐”는 질문에는 구체적인 답변을 피했다. 권익위가 챙길 것은 국민이 불편해하는 점, 불합리하게 여기는 점을 잘 고친다는 칭찬이어야 한다.

권익위 권고를 받았더라도 관련 부처들이 제대로 판단했어야 했다. 관리현장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지자체가 현장과 맞지 않는 권익위 또는 다른 부처의 권고에 아무 말도 못 한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섭다. 이번 일로 빚어진 행정력 낭비는 누가 책임지고, 이번에 드러난 지자체 행정 능력에 대한 실망은 누가 메워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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