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홍릉과 유릉

재작년 가을 시작한 조선왕릉 산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42기 조선왕릉 중 남한에 있는 40기의 마지막 두 능이 함께 있는 경기도 남양주로 다시 향한다. 격동하는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라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의 두 황제 고종과 순종 부자가 잠든 곳, 홍릉과 유릉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홍릉 전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홍릉 전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고종태황제,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

고종(1852~1919, 왕 재위 1863~1897, 황제 재위 1897~1907)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군(興宣君, 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1852년(철종 3) 한성부 정선방 사저(현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으로,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됐다. 

고종의 아명은 명복(命福)이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추존 익종)의 부인으로, 흔히 조대비라 불리는 신정왕후 조씨(당시 대왕대비)는 흥선군과 손을 잡았다. 그녀는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명복을 자신과 죽은 남편 익종의 양자로 삼아 대통을 잇도록 했다. 왕위 계승자가 된 명복은 익성군(翼成君)에 봉해지고, 관례를 행한 후 왕위에 올랐다.

열두 살의 어린 왕을 대신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했다. 고종이 15세가 되던 1866년(고종 3) 그녀가 수렴을 거둠에 따라 소년 왕의 친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아버지 대원군이 막후에서 국정을 주물렀다. 그는 경복궁 중건에 따른 세 부담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또 쇄국정책을 고집하고 천주교를 박해했다. 8000여 신자들이 학살당한 병인박해(1866)로 9명의 자국 신부들이 죽은 프랑스의 보복으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보다 앞선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의 통상 요구 사건은 신미양요(1871)로 이어졌다.

병인·신미양요 후 쇄국은 더욱 강화됐으나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고종의 왕비 민씨가 대신들과 유림을 앞세워 대원군을 견제했기 때문이다. 1873년(고종 10) 동부승지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고종은 대원군의 정치 간여를 차단했다. 하지만 집요하게 정치적 영향력 회복을 시도하던 아버지와 대립하고, 왕비의 척족인 민씨 세력이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서 고종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했다. 민씨 정권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후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런 가운데 지배층이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면서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 일어났다. 또 각지에서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일어난 민란은 동학혁명(1894)으로 폭발하고 결국 갑오개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조선 왕실은 청과 일본의 힘을 빌어야 했고, 이후 러시아와도 손을 잡았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고종 32) 군인과 낭인들을 동원해 왕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겼다(아관파천). 1년 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이하 양력) 원구단(圜丘壇, 환구단으로도 읽음)에 제사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고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다. 또한 죽은 왕후 민씨를 황후로 추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했다. 이어 이튿날 이를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강압으로 1904년 제1차 한일협약(한일의정서),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 사건 후 일본과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대신들의 강요로 그해 7월 18일 고종은 아들 순종에게 대리청정하게 한 후 다음날 선위했다. 사실상 강제로 퇴위당한 것이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은 1910년 한일합방 후엔 태왕으로 격하돼 덕수궁에 머물다가 1919년 1월 21일 함녕전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퇴위한 순종과 신하, 인척들이 의논해 ‘문헌무장인익정효(文憲武章仁翼貞孝)’라는 존호를 올리고 묘호를 ‘고종(高宗)’이라 했다. 그의 사후 세간에 퍼진 독살설은 3·1 만세 운동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일인들에게 시해된 명성태황후

명성황후 민씨(1851~1895)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51년(철종 2) 여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66년(고종 3) 한 살 아래인 고종의 왕비로 책봉됐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실권을 장악한 그녀는 친정 일가를 배후세력으로 정치에 간여했다. 임오군란 때는 궁궐을 탈출, 청에 원병을 요청해 난을 진압하고 다시 실권을 잡았다. 갑신정변 때도 청을 개입시켜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갑오개혁 때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 했다. 

이 같은 행보에 불만을 품은 일본 공사 미우라는 1895년(을미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군인과 낭인들로 하여금 그녀를 제거하게 했다. 이들은 왕비의 침실인 경복궁의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로 들이닥쳐 궁녀들 사이에서 그녀를 찾아내 살해하고 시신을 궁 밖에서 불태웠다. 이틀 후 일본의 요구로, 죽은 왕후 민씨는 폐서됐다. 그러나 고종은 다음날 폐서인 민씨에게 빈(嬪)의 칭호를 특사하고, 다시 이튿날엔 왕후의 위호를 회복시켰다. 1897년(고종 34) 3월 ‘명성(明成)’이란 시호를 받은 그녀는 같은 해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황후로 추존됐다.

일본에 의해 시해된 왕후 민씨의 처음 시호는 ‘순경(純敬)’,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능지를 동구릉 내 숭릉 오른쪽 산등성이로 정하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김홍집 내각 붕괴와 아관파천으로 중단됐다. 1년 이상 장사를 지내지 못하던 중 1897년 1월 능지를 양주 천장산 아래 청량리(현 숭인원(崇仁園) 자리)로 새로 정했다. 같은 해 10월 황후로 추존한 민씨의 능호를 홍릉(洪陵)으로 고쳐 11월 22일에 장사지냈다. 

홍릉 능침(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홍릉 능침(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1900년 6월 홍릉 자리가 좋지 못하니 옮겨야 한다는 이재순의 상소로 천장 논의가 진행됐다. 그해 10월 양주 군장리로 천릉지가 정해졌다가 이듬해 4월 다시 양주 묘적산 금곡으로 바뀌었다. 천장 일정까지 논의됐으나 돌연 공사가 중단된 채 지지부진하다가 1904년 11월 고종이 산릉 및 천릉 두 도감을 해체함으로써 천릉은 백지화됐다. 정치 상황 급변, 그리고 같은 달 초에 죽은 황태자비 민씨의 무덤 유강원(裕康園) 공사와 겹치게 된 데 따른 조치로 여겨진다. 그 후 1919년 1월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2월 16일 홍릉을 양주 금곡 현재의 자리로 옮긴 데 이어 3월 4일 고종을 합장했다.
 

순종 국장 계기로 6・10 만세 운동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은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둘째 아들로 1874년(고종 11) 창덕궁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됐고, 1897년(광무 1)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태자로 책봉됐다. 1907년(광무 11) 7월 고종의 강제 퇴위로 대한제국 두 번째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융희(隆熙)’로 고쳤다. 즉위 직후 일본의 한국 병합을 위한 정미7조약(丁未七條約) 강제 체결에 이어, 1909년(융희 3)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강탈당했다. 결국 1910년(융희 4) 8월 29일 친일파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가 됐다. 

유릉 전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릉 전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그 후 이왕(李王)으로 강등돼 창덕궁에 거처하던 그는 1926년 4월 25일 대조전에서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은 없었다. 이복동생으로 사왕(嗣王, 왕위 후계자)인 영친왕(英親王)이 원로 재신 및 종친들과 의논해 묘호를 ‘순종(純宗)’, 제호는 ‘효황제(孝皇帝)’, 시호는 ‘문온무녕돈인성경(文溫武寧敦仁誠敬)’이라 올렸다. 순종의 국장을 계기로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순종의 첫 번째 부인 순명황후 민씨(1872~1904)는 여은부원군 민태호의 딸로 1872년(고종 9) 한성부 양덕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 왕세자빈으로, 1897년(광무 1) 황태자비로 책봉됐다. 그러나 순종 즉위 전인 1904년(광무 8) 11월 5일 경운궁 강태실에서 32세로 세상을 떠나 ‘순명(純明)’이란 시호와 ‘유강(裕康)’이란 원호(園號)를 받았다. 1907년(융희 1) 순종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됐다.

두 번째 부인 순정황후 윤씨(1894~1966)는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로 1894년(고종 31) 양근(현 양평) 외가에서 태어났다. 1907년(광무 10)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같은 해 순종이 즉위하자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로 봉해졌다. 1910년(융희 4)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자 이왕비(李王妃)로 강등돼 창덕궁에 거처하다 1966년 2월 3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이 없어져 시호를 올릴 군주가 없던 터라 정식 시호는 받지 못했다. 사후 종묘에 부묘될 당시 생존했던 영친왕이 ‘헌의자인순정효황후(獻懿慈仁純貞孝皇后)’라는 사시(私諡)를 올려 순정효황후로 불린다.

유릉 원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릉 원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릉(裕陵)은 한 봉분 안에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를 모신 조선왕릉 유일의 3인 합장릉이다. 1904년 황태자비였던 순명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양주 용마산 내동(현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유강원을 조성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순명비를 황후로 추존하면서 유강원도 유릉으로 추봉됐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6월 5일 순명황후의 유릉을 홍릉 동쪽 언덕으로 천장한 후 6월 11일 순종을 합장했다. 그 후 1966년 순정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2월 13일 유릉에 합장했다.
 

‘영릉 가백년’ 맥없이 막을 내리다

명나라 황제릉의 양식을 적용한 홍릉과 유릉은 이전의 조선왕릉과 몇 가지 차이를 보인다. 향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어로가 설치됐다. 종래의 정자각(丁字閣) 대신 ‘일자(一字)’형의 ‘침전(寢殿)’을 세웠다. 지붕 또한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바뀌었다. 침전 전면에 계단이 생기면서 침전에서 홍살문까지 향·어로가 직선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커다란 차이는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을 제외한 석물이 제향공간으로 내려온 점이다. 

홍릉 침전(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홍릉 침전(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릉 능침
유릉 능침

능침공간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홍살문에서 침전 사이 향·어로 양편에 배치됐다. 왕릉의 석물 중 석호와 석양이 사라진 대신에 명 황제릉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향·어로를 두고 마주 보고 서 있는 문·무석인 옆으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차례로 배치돼 있다. 특히 유릉의 석물은 서양식 조각 수법이 많이 반영돼 홍릉보다 더 사실적이다.

‘영릉 가백년(英陵 加百年)’이란 말이 있다. 1469년 세종의 영릉을 여주 명당으로 옮겨 조선왕조가 백 년을 더 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 말이 맞다면,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 이어진 조선의 백 년은 이에 해당하는 기간일 터다. 조선 부흥의 기대주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 순조는 열한 살, 이어 순조의 손자인 헌종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조선 역대 최연소 1, 2위의 어린 임금들이었다. 이들을 대신해 정순, 순원왕후가 각각 수렴청정하면서 그 친정 경주 김씨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왕권은 약화됐다. 헌종이 죽고 열아홉 살 철종이 왕위를 잇자 다시 한번 순원왕후가 청정하는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렇게 세도정치에 묻혀 별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순조, 헌종, 철종 시대 60여 년을 지내는 사이 나라는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유릉 설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유릉 설경(출처 : 국가문화유산포털)

‘가백년’의 남은 40여 년, 고종 또한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해 대왕대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의 정치 간여로 뒤늦게 친정을 시작했다. 이후 명성왕후와 민씨 일가의 세도정권으로 나라를 지켜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들 순종이 이어받은 대한제국은 결국 3년 만에 무너졌다. 순조·헌종·철종을 거치면서 병증이 깊어진 조선이 고종 대에는 중환자로, 순종 대에는 뇌사 끝에 사망한 셈이다. ‘영릉 가백년’은 그렇게 맥없이 막을 내리고, 화려해진 황제릉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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