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미 관리사무소장/제주 화북1아파트
김연미 관리사무소장/제주 화북1아파트

“소장님, 엘리베이터에 장미꽃 예쁘던데요? 아침부터 정말 상큼한 선물을 받았지 뭐예요.”

누군가 관리사무소 문을 빼꼼히 열고 고개만 내밀어 인사를 한다. 관리사무소 안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으신 듯 그 상태 그대로 나를 바라보며 웃는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넨다. 

“아, 예. 고맙습니다. 어디 나가세요?”

“응, 딸네~.”

짧게 대답하고는 기분 좋게 손을 흔들며 문을 닫는다. 201동에 사는 할머니다. 승강기 안에 좋은 시 한 편 올려 두면서 장미 사진을 첨부했더니 그걸 보고 칭찬하신다. 관리사무소 문은 닫혔지만 할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따뜻한 마음이 그새 사무실 안에 꽉 차 있다. 기분 좋은 하루가 시작될 것 같다. 

“아휴~ 관리직원들이 고생해서 나무 전정을 다 하니까 아파트가 얼마나 단정해졌는지 몰라.” “내가 마트 갔다 오는데 우리 경비 아저씨가 시장 본 거 무겁다고, 내 시장 가방을 들어서 엘리베이터까지 갖다주시는 거야. 세상에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오늘 물탱크 청소했다면서? 아휴~ 물탱크 청소를 매번 그렇게 깔끔하게 하니까 우리 아파트 물맛이 그렇게 좋은 거구나~” 

할머니는 관리사무소에서 하는 일에 대해 항상 좋은 말을 골라 해 주셨다. 관리사무소 일에 관심도 크다. 그렇다고 관리사무소에서 하는 일이 다 마음에 들 리 없을 것이다. 관리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생각만 나는 것도 아닐 텐데, 할머니는 굳이 좋은 이야기를 찾아서, 굳이 관리사무소 문을 열고 이렇게 좋은 말씀을 놓고 가신다. 

이미 10년도 더 된 날의 기억이다. 일흔하고도 몇 년이 더 지난 나이에도 소녀처럼 당신의 감정을 표현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관리사무소장과 입주자로 만났지만 참 좋은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 어린 나이에도 했었던 것 같다. 

당시 할머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나도 할머니처럼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같은 상황이어도 좋게 보자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보자면 또 얼마든지 나쁘게 볼 수 있는 것이니 굳이 상대방 기분 나쁘게 좋지 않은 말을 골라 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에 따라 같은 상황이어도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매사 나쁘게 말하고, 좋게 말하는 사람은 매사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같은 말이어도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인데, 이왕이면 듣는 사람 기분 나쁘지 않게, 좋게 말을 해주면 천 냥 빚 아니라 만 냥 빚이라도 탕감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오죽했으면 전화 안내 멘트에 ‘거친 표현을 삼가달라’는 내용이 단골로 들어가겠는가. 당신이 하는 거친 말이 녹음될 수 있다는, 그래서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은근한 협박(?)까지 가미된 안내 멘트가 직원 목소리보다 더 먼저 응대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관리사무소에 민원을 제기하는 입주자들이 거친 말투를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리사무소를 방문하는 일이라는 게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는 게 있어서고 보면 그들의 거친 말투가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뜬금없이 폭탄처럼 날아드는 입주자들의 거친 말투는 근무경력이 아무리 쌓여도 면역이 생기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많은 소장들이 마음속에 부처님을 열 분 정도 모시거나 예수님, 성모마리아까지 다 동원하면서 민원인들에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도 불쑥 활화산처럼 터지는 성질머리를 어쩌지 못해 속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을 해버린다. 그런 뒤에는 아무리 씩씩거려 봐도 풀리지도 않을 분함과 더불어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가 적잖이 밀려든다.

아직 멀었다 싶다. 베테랑 소장이 되기 위해선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고작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는 자괴감까지 생긴다. 나도 일흔이 되면 그때 그 할머니처럼 소녀 같은 표정으로 좋은 말들만 골라서 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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