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원대학교 소방방재공학과 박형주 교수


 
 
 
최근 소방방재청에서 전국의 공동주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소방차 진입로 및 고가사다리차 전개 공간 확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아파트의 6%가 단지 내 도로 여건으로 소방차의 진입이 불가능하거나 진입하더라도 5분 이상의 시간이 소요돼 화재 발생 시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뿐만 아니라 전체 아파트의 15%는 고가사다리차가 화재현장에 투입돼도 사다리를 펼 수 있는 기본적인 공간 확보조차 어려워 더 큰 화마의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원대학교 소방방재공학과 박형주 교수는 “공동주택 내 소방 활동 공간 확보 의무화에 관한 법제화가 시급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화재 발생 시 최대한 안전하게 구조를 기다리거나 탈출할 수 있는 대피공간 및 비상탈출구의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근래에 발생한 몇 건의 아파트 화재 사고가 소방당국의 발 빠른 대처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인명사고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박  교수를 만나 공동주택에서 발생하는 화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사상자가 속출하는 원인과 그 해결방안 등에 대해 들어봤다.
 
 
대피공간·비상탈출구 등 마땅한 피난시설 없다
 

“공동주택 입주민의 대다수는 당장의 편리성만을 생각한 나머지 화재 발생 시 대피하거나 탈출할 수 있는 공간을 스스로 없애고 있다”며 말을 꺼낸 박 교수는 소중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화재안전기준에 대한 단속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행태에 일침을 놓는다.
화재가 발생하면 경량구조로 이뤄진 발코니 세대 간 경계벽을 허물어 비상탈출구로 이용하거나 발코니 자체를 대피공간으로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이 실제로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 탓에 화재와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입주민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법은 소방관이 재빠르게 화재를 진압하고 구조해주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박 교수는 최근 행해지고 있는 무분별한 발코니 확장이 더 큰 문제라며 우려를 나타낸다. 화재 발생 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대피방법은 발코니에서 버티며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지만 이런 장소마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발코니 확장 시 준수해야 할 안전기준, 가령 방화유리를 설치해야 한다거나 확장된 발코니 바닥은 불연재로 시공해야 한다는 것 등의 안전기준도 시공비가 비싸다는 이유로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인다.
아파트의 값어치가 상승한다거나, 좀 더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혹은 미관상 보기 좋게 한다는 이유로 확장하는 발코니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공동주택 입주민들의 마지막 안전망이자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고층·좁은 단지서 화재 구조 활동 무리
고가사다리차·에어매트에 안심말라
 

박 교수는 “아파트 층수가 높아질수록 외부에서 구조 활동을 펼치는 것에 많은 무리가 따른다”며 “공동주택 입주민들이 화재 발생 시 동원되는 고가사다리차와 매트리스를 염두에 두고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은 큰 오산”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고가사다리차는 단지까지의 진입이 힘들 때가 많으며 화재가 일어난 현장까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사다리를 펼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 부딪혀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고가사다리차는 4×12m의 주차공간과 반경 15m 이상의 사다리 배치 공간, 10도 이하의 도로 경사 등의 조건이 갖춰져야 사다리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또 “매트리스는 일분일초를 다투는 화재현장에서 구조를 주목적으로 사용하는 장비가 아니다”며 “투신자살 소동자 등 어느 정도 시간적인 여유가 보장되는 사건현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장비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전한다. 화재현장에 도착한 매트리스가 옮겨져 공기가 주입되는 시간만 어림잡아 15분 이상이다. 이러한 시간소모를 제외하더라도 구조를 기다리던 끝에 뛰어내리는 입주민의 정확한 추락지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인정하기 싫은 부분이지만 공동주택 입주민을 비롯한 우리 국민들이 화재 발생 시 인명구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 생각했던 고가사다리차와 에어매트는 절대적으로 의존할 만한 구조장비가 아니라는 뜻이다.
 
 
하향식 경보형 비상사다리 설치 의무화 추진해야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아파트가 건설되고 그에 대한 수요 또한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여기에 발맞춰 소방과 관련된 안전규제가 뒷받침돼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아파트 내 소방 활동 공간 확보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 더욱 시급한 것은 대피공간이나 비상탈출구 등의 피난시설 구비에 관한 제도적인 장치 마련”이라고 강조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결되는 발코니 안전시설을 엄격하게 관리해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동주택에 ‘하향식 경보형 비상사다리’를 설치해 화재가 발생하면 신속하게 탈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우리나라의 공동주택은 계단실이 좁고 화재 시 발생하는 매연을 완벽하게 막을 수도 없을뿐더러 소방관의 화재 진압이 가장 어려운 곳”이라며 “이러한 우리나라 공동주택의 현실상 화재발생 시 가장 실효성을 거둘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은 하향식 경보형 비상사다리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소방 활동 공간 확보 의무
 

박 교수는 “아파트 건축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소방 활동 공간을 위한 공지를 확보케 하는 강력한 법안마련이 필요하다”며 “소방 활동 공간을 염두에 두지 않고 건설된 아파트들은 주차장이나 화단을 없애고서라도 화재 진압 시 아무런 무리가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소방 활동을 위해 주차장이나 화단을 없앤다고 한다면 입주민들의 반발이 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화재가 발생했는데 소방당국이 진화작업을 벌일 공간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피해규모가 커지더라도 소방력을 탓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각서를 받아야 한다”며 소방 활동 공간 확보의 필요성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고 박 교수는 말한다. 이러한 타협에도 불구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내 가족과 내 이웃의 생명을 지키는 예방책인 소방 활동 공간 확보를 주차장이나 화단 따위와 맞바꿀 입주민은 없을 것이다.
 
 
공동주택 입주민, 안전의식 숙지해야
 
 
박 교수는 “아파트 입주민들은 화재에 대한 비전문가이다 보니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화재가 자신에게도 닥칠 가능성을 무시하고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크다”며 “이런 행태가 바뀌어 공동주택의 화재도 교통사고처럼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입주민들 스스로 자발적인 안전의식을 키워야 한다”고 당부한다.
물론 공동주택 화재 시 최대한 안전하게 구조를 기다리거나 탈출할 수 있는 대피공간 및 비상탈출구 마련, 그리고 공동주택 내 소방 활동 공간 확보 의무화에 관한 법제화가 시급하다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최우선시 돼야 하는 것은 올바른 안전의식을 바탕으로 한 화재의 예방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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