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범 L씨와 10개월간의 재판

 

1년 전 고 이경숙 소장이 근무한 인천 모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에서 펼쳐진 촛불추모 행사.
1년 전 고 이경숙 소장이 근무한 인천 모 아파트 관리사무소 앞에서 펼쳐진 촛불추모 행사.

 

지난 9월 16일 고 이경숙 소장 살해범 L씨에 대한 최종심이 열렸다. L씨가 올해 7월 2심의 징역 20년형이 부당하다며 대법원에 상고를 제기해 열린 재판이었다.

이 소장의 언니 이모씨(61)는 가족 중 혼자 대법원 재판정에 참석했다. 그는 10개월 동안 이어진 재판에 몸과 마음이 지쳐 하루빨리 마무리 짓고 싶다고 말했다. 3심에서 형량이 낮아지진 않을까 불안해했다.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한다.” 대법원은 L씨의 상고를 기각하며 징역 20년형을 확정했다. 대법원 재판부의 짤막한 한마디로 1년여 이어진 유족들의 긴 싸움이 끝을 맺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될 줄 알고 어젯밤 꿈에 경숙이가 인사하러 찾아왔나 봐.”

선고 직후 언니 이씨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주변에 말했다. 유족을 대표해 언론의 취재에 응하고 재판에 참석하며 동생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해온 이씨였다. 그녀는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재판정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지난해 10월 28일, 인천의 한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 60대 남성 L씨는 관리사무소에 홀로 있던 이경숙 소장을 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L씨는 도주했다가 사건 당일 경찰에 자수해 체포됐다. 

그는 살인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9월까지 총 8차례의 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살해범에게 징역 30년을 구형했지만 3주 뒤 1심 인천지방법원은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2심 서울고등법원은 1심 형량이 유지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언니 이씨는 “기다리는 시간 내내 고통스러웠다”고 말한다.

L씨 측은 재판 내내 범행의 원인을 이 소장의 책임으로 돌리는 말을 했다. L씨 측은 1심 선고 직전 최후변론을 통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칼을 준비한 것은 위협을 통해 (이 소장의) 횡령을 원위치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 소장이 횡령을 저질렀다고 의심한 것은) 착오였다.” 

고인이 횡령을 저지른 사실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 재판을 통해 명백하게 밝혀졌다. 오히려 L씨의 끊임없는 의심과 간섭에 고 이 소장이 스스로 외부회계감사를 요청했고 사건 당일도 감사가 진행 중이었다. 누구라도 돈 문제가 있었다면 감사를 자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L씨는 “입대의 회장 활동비를 증액해 달라”거나 “나를 집으로 초대해라”는 등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1심 재판은 L씨의 계획범행 여부를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재판부는 L씨가 사건 전 인터넷에서 변호사를 검색하고 신변을 정리한 점, 사건 당일 과도를 준비해 관리사무소에 찾아간 점, 관리사무소에 들어가자마자 별다른 대화 없이 고 이 소장을 칼로 수 회 찌른 점, 치명적인 부위를 찌른 점, 사건 직후 관리사무소를 나와 태연하게 신발 등을 정리한 점 등에 비춰 계획적 범행에 무게를 뒀다.

이러한 정황은 사건 당시 관리사무소에 설치돼 있던 CCTV 영상으로 입증됐다. CCTV는 고 이 소장이 직접 설치한 것이었다. 버튼을 누르면 녹화가 시작되는 시스템이었다. 고 이 소장은 사건 당시 L씨가 들어오자마자 버튼을 눌렀다. 고인이 평소 L씨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강하게 느껴왔다는 점을 드러낸다.

검찰은 재판장에서 CCTV 영상 확인을 요청했고, 재판부는 영상이 잔혹하다면서 방청인 전원을 잠시 퇴정시키기도 했다. 얼마나 끔찍한 장면이었으면 방청인들이 보지 못하게 했을까. 고인이 겪었을 고통의 순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방청인들은 몸서리를 치기도 했고 크게 한숨을 쉬고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L씨가 평소 내원하던 병원의 간호사 Y씨는 법정에서 사건 전 L씨가 찾아와 ‘멀리 떠난다’는 취지로 말하거나 2개월 치 약을 미리 처방받았다고 증언했다. 이것도 계획범행의 증거였다. 

1심 법원은 사실관계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검찰이 구형한 형량보다 13년이나 낮은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4월 1심의 선고 순간 방청석에선 “아…” 하는 장탄식이 터져 나왔다.

재판에 참석했던 고 이 소장의 유족들은 당혹해했다. 언니 이씨는 눈물을 보이며 “못해도 징역 20년에서 25년을 예상했었다”면서 “억울해 마음을 추스를 수 없다”고 말했다. 오빠 이씨도 “판결이 너무 관대하다는 생각”이라며 침통한 표정이었다.

양측은 즉각 항소를 제기했다. L씨 측은 우발적 범행이었다는 주장을 유지했다. 6월 말 2심 선고공판에 참석한 언니 이씨는 “L씨 측에서 몇 차례 합의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전하며 L씨에 대한 엄벌만을 고대한다고 말했다. 

유족과 주택관리사 동료 1만5,440명은 엄벌 촉구 탄원서를 제출했다. 1만명 목표였는데 대한주택관리사협회(본회 및 인천시회)의 탄원 참여 인원은 9일 만에 1만5,000명을 넘겼다.

2심 법원은 유족의 목소리를 더 무겁게 들었다. 6월 2심 법원은 1심 선고 형량보다 3년 높은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2심 판결 직후 유족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이제야 경숙이 볼 낯이 조금 생겼다.” 언니 이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음을 전했다. 강기웅 대주관 인천시회장은 “엄벌이 이뤄지길 바랐던 유족과 동료들의 기대엔 미흡하지만 사건의 심각성을 무겁게 판단한 2심 재판부의 판결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2심 선고 후 L씨는 곧바로 상고를 제기했다. 유족 측은 상고하지 않았다.

고 이 소장의 1주기를 앞두고 언니 이 씨는 가족의 근황을 전했다. “경숙이가 그렇게 된 이후 어머니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최근 요양시설의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 나도 심리치료를 받으며 1년을 보냈다. 아직 손해배상 민사소송 절차가 끝나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얼른 마무리 짓고 이제 동생을 평안한 곳으로 보내주고 싶다.”

언니 이씨도 사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최근 교통사고로 입원 중인 그는 동생의 동료들에게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난 1년간 동생을 위해 마음 써주고, 발 벗고 나서주고, 저희에게 힘을 실어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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