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주의 안전한家 든든한家]

조현주 코이지 대표
조현주 코이지 대표

며칠 전 한 어르신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거실 소파 옆에는 작은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전기포트와 약통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어르신은 “싱크대로 가는 동안 뭘 하러 가는지 자꾸 까먹는다”며 “여기서 바로 물을 끓이고 약을 챙기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식탁 위에는 항상 투명 매트가 깔려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약을 먹고 버린 약봉지가 꽂혀 있었다. 처음엔 ‘왜 쓰레기를 여기 넣어두시지?’라고 생각하며 치워버린 적도 있었다. 나중에야 그것이 ‘오늘 약을 복용했는지’ 확인하기 위한 기억 장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억이 흐려질수록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기보다 생활 동선을 단순하게 만들고 익숙한 자리에 필요한 것을 두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움을 기억하기보다 익숙한 것을 반복할 때 마음이 안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집 안의 동선 유지하는 것이 기억 건강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된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며 순간 길을 잃는 경험도 몸이 ‘집에서의 익숙한 동선’을 무의식중 따라가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온 공간이라도 가구나 물건 위치가 자주 바뀌면 어르신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혼란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국립중앙치매센터 조사에 따르면 치매 어르신의 절반 이상이 집 안에서 낙상을 경험했으며 그 원인 중 하나가 동선 혼란이었다. 침대의 위치가 바뀌거나 거실 가구가 갑자기 재배치되면 예전 기억과 실제 공간이 맞지 않아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결국 인지 건강은 공간의 질서와 직접 연결돼 있는 셈이다.

고령자 가정에는 오랜 세월 쌓인 짐들이 통로를 점령한 경우가 많다. 복도에 운동기구가 놓여 있거나 수납장이 방문 주변을 막고 있는 집도 흔하다. 이러한 환경은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 뿐 아니라 흐르던 기억의 흐름까지 끊어 놓으며 동선을 복잡하게 만든다.

인지 건강을 돕는 공간은 모든 것을 버리고 새 물건을 채우는 방식의 거창한 리모델링이 아니다. 익숙한 공간을 다시 정돈하고, 익숙한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돕는 것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어 침실에서 욕실로 향하는 통로에 작은 수납장이 놓여 있다면 편리할 수 있지만 이동할 때마다 몸을 틀어야 하고 부딪힐 위험이 있다. 이럴 때는 가구를 벽 쪽으로 붙이거나 방 안으로 옮겨 통로를 최소 80㎝ 이상 확보하는 것이 좋다.

식탁 주변에는 약통, 안경, 리모컨, 열쇠처럼 자주 사용하는 물건을 두어 찾는 시간을 줄이고 반대로 오래 쓰지 않는 물건은 시야에서 치워 인지적 부담을 덜어야 한다. 물건이 적을수록 시야가 넓어지고 기억해야 할 정보도 단순해진다. 익숙한 자리, 예측 가능한 위치, 손이 닿는 범위 등 3가지만 지켜져도 어르신들의 일상은 훨씬 편안하고 안전해질 수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가족이 도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도 결국 동선 정리다. 침실-욕실-거실-주방으로 이어지는 기본 동선이 막히지 않도록 정리해 주는 것만으로도 낙상 위험은 크게 줄어든다. 활동 범위가 쾌적해지면 몸의 균형이 자연스레 잡히고 불편함도 감소한다.

고령자 가정에서는 △집 안 주요 통로에 장애물이 없는지 △조명이 어둡거나 깜빡이는 곳은 없는지 △가구가 지나치게 복잡하게 배치돼 있지는 않은지 △자주 쓰는 물건이 손이 닿는 위치에 놓여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만으로도 안전사고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관리사무소에서도 단지 점검 시 위 항목을 참고하고 고령 입주민이 많은 단지는 공용부분 공사나 구조 변화가 있을 경우 사전 안내문을 꼭 배포할 필요가 있다. 익숙한 구조는 어르신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인지건강은 병원에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집 안의 작은 질서, 반복되는 동선이 곧 최고의 예방이다. 복잡한 기술보다 중요한 것은 익숙함을 지키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다. 어르신의 기억과 안전을 지키는 첫걸음은 바로 그 작은 정리에서 시작된다.

 

조 현 주 l 한국편의증진연구원(코이지) 대표. 시니어 대상 홈케어 콘텐츠・플랫폼 개발. 저서 ‘부모님을 위한 나들이 안내서’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