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형필의 판례탐구]

권형필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
권형필 변호사/법무법인 로고스

공동주택 관리의 투명성과 자치운영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해마다 진화를 거듭해 왔지만, 실무에서는 여전히 절차적 정당성과 실체적 이유 사이의 균형이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2025년 2월,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은 ‘이유 있는 절차’가 아닌 ‘절차 없는 이유’로 집행된 해임투표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의미 있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이 사건은 입주자대표회의 동 대표 6인(원고들)이 일방적 해임처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무효를 확인받기 위해 제기한 소송이었습니다.

피고인 입대의 측은 원고들에 대한 해임사유로 ‘옹벽공사 관련 부적절한 업무처리’, ‘비협조적 회의 진행’, ‘공공연한 불화 조성’ 등을 내세웠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옹벽공사와 관련한 행위들은 원고 A가 동대표로 임기를 시작하기 전의 일로 밝혀져 해임사유로 삼기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고, 다른 사유 역시 실체가 구체적으로 소명되지 않았거나 객관적 증거 없이 주장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처럼 공동주택 내 자치기구의 대표자 해임은 단순한 민원이나 인상비평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과 명백한 위법 내지 부적절한 행위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을 확인한 것입니다.

공동주택관리법 제14조 제4항 및 이 사건 아파트의 관리규약에 따르면 동대표의 해임은 입주자 등의 서면동의, 객관적 해임사유, 소명기회 부여, 그리고 투표 전 공개 등 엄격한 절차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본 사건에서는 △해임사유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투표 공고나 투표용지에 첨부되지 않았고 △입대의의 정식 결의 없이 선거관리위원회가 일방적으로 해임절차를 진행했으며 △해임사유에 대한 입주민들의 객관적 판단을 저해할 정도로 단정적이고 편향된 문구로 유권자의 선입견을 유발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법원은 “마치 원고들에 대한 의혹이 사실로 확정된 것처럼 기재해 선입견 없이 공정한 투표가 이뤄지기 어려웠다”며 중대한 절차적 하자를 근거로 해임결의 전부를 무효로 판단했습니다.

공동주택의 입대의는 구분소유자들의 대표기구로서 자치적 운영과 감시, 견제기능을 수행하는 준 공적 조직입니다. 따라서 대표자에 대한 해임은 ‘다수의 의사’라는 형식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정당한 이유’와 ‘공정한 절차’라는 실질적 요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본 사건에서 법원은 바로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선관위가 해임투표를 주도하면서도 기본적인 절차조차 누락한 점, 객관적 증거 없이 단순한 주장과 감정적 대립이 해임사유로 둔갑한 점은, 공동주택 자치기구가 갖는 권한 남용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라 할 것입니다.

이 사건과 병합된 회장 보궐선거의 경우에도 관할 관청인 부산 북구청은 절차상 문제를 이유로 대표자 변경 신고를 수리하지 않았고, 해임된 원고 A가 여전히 회장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후임자라는 사람이 직무집행금지가처분을 제기했으나 법원이 이를 기각했습니다. 법원은 가처분 단계에서 이미 “해임 및 보궐선거 모두 무효로 볼 여지가 많다”고 판단했으며, 본안 판결에서는 이를 명확히 확인한 것입니다.

이번 판결은 공동주택의 입대의 등 자치기구에서 대표자의 해임을 추진하는 경우 단순히 형식적인 절차 요건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그 해임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며, 해임의 실질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한 해임사유가 존재해야 하고, 이는 관련 증거를 통해 명확히 입증돼야만 한다는 점에서 대표자의 해임은 단순한 ‘의심’이나 감정적 대립에 근거해서는 안 되며, 법적·사실적으로 입증 가능한 ‘이유’에 기반해 이뤄져야 한다는 중요한 원칙을 다시금 확인시켜 줬습니다.

또한 공동주택 선관위가 입대의의 의결이나 정식 요청 없이 독자적으로 해임투표 절차를 주도하거나, 해임사유에 대한 객관적 검토 없이 일방적인 결정을 밀어붙이는 등의 행태는 자칫 권한을 남용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는 절차적 정당성의 심각한 훼손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의 직무 수행에 있어 중립성과 절차 준수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강조됐습니다.

입대의 구성원으로 선출된 동대표는 단순한 개인적 직위가 아니라 공동주택 내 공동체를 대표해 일정한 공적 권한과 의무를 수행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그 지위는 사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공공성과 법적 안정성을 전제로 보호돼야 하며, 이와 같은 대표자가 사실관계나 절차적 요건의 하자 없이 부당하게 해임되는 경우에는 해당 대표자가 민사소송 등의 법적 절차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회복하고 명예를 되찾는 것은 단순한 개인 구제를 넘어 해당 자치기구의 운영 전반에 대한 정당성과 신뢰를 회복하는 데도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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