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방학이나 명절에 조부모님 집에서 자고 온다는 것은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이었다. 용돈을 기대했던 것도 있지만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에서 밤을 보낸다는 게 신나는 모험과 같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어린 우리를 내려놓고 그냥 가셨다. 편한 잠자리, 어수선한 살림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성인이 돼서 알게 됐다.
나는 요즘 한 지자체에서 진행하고 있는 고령친화주택개조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지내기 불편하고 낡은 집을 살기 편안하고 쾌적한 환경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공사가 완료된 후 어르신에게 달라진 집이 어떤지 물어봤더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이 깨끗하고 싹 고쳐지니까 자식들이랑 손자들이 자주 와서 너무 좋다”는 것이다.
주거환경을 개선할 때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정리 정돈, 즉 청소다. 집안에 불필요한 짐을 버리고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어르신들이 지내기에 훨씬 쾌적한 환경이 된다. 몸이 힘들어서, 물건들을 어떻게 버리는지 몰라 미뤄둔 일들이 결국 비위생적이고 불쾌한 환경을 만든다.
정돈된 공간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높여준다. 나이 들어 특히 중요한 것이 몸과 마음의 안정이다. 깨끗하고 정돈된 집은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자녀들과 어린 손자녀가 자주 방문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환경이 되기도 하다. 정리된 공간이 노인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무엇일까.
첫째, 신체적 안전성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 정돈된 환경은 낙상을 예방한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노인들의 주요 부상 원인 중 하나가 가정 내 낙상 사고라고 지적한다. 정돈된 환경에서는 장애물과 위험 요소가 감소해 낙상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정돈된 집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은 그렇지 않은 노인들에 비해 낙상 사고 발생률이 30% 낮다. 실제로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밟아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물기 제거를 위해 깔아 둔 수건이 바싹 마른 걸 모르고 무심코 지나다니다가 미끄러지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현관에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택배 상자나 재활용품 등도 미리 정리해 발 걸림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좋다.
둘째, 정신적 안정감을 높여준다. 201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의 연구 결과 정리 정돈이 잘된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증 증상이 현저히 낮았다고 한다. 정돈된 공간이 스트레스 감소와 기분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는 정리된 환경이 마음의 평화를 제공하고 부정적 감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셋째, 위생적인 환경의 중요성도 강조된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연구에 따르면 청결한 환경은 알레르기와 호흡기 질환 발병을 감소시킨다. 먼지와 오염물질이 적은 정리된 공간은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면역력이 약해질 수 있는 노인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주기적인 청소 통한 환기는 공기 순환을 돕고 정체된 공기 안에 있는 좋지 않은 냄새도 날려준다.
넷째, 효율적인 생활 습관을 만들 수 있다. 한 연구에서는 정리 정돈이 잘된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신체 활동을 함으로써 전반적인 건강 수준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좋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필요한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어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더 활동적인 생활이 가능해진다는 것. 정리 정돈이나 청소를 위해 신체를 자주 움직이니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신체 활동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다. 일상에서의 사소한 움직임이 습관이 되니 공간은 쾌적하게 만들고 신체는 더욱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자존감이 높아지고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실제로 이번 고령친화주택개조 사업에 참여하면서 집안 환경이 지저분한 집에 방문할 때면 어르신들은 “몸이 아파 정리도 못 하고 청소도 하기 힘들어서 이렇게 산다”고 토로했다. 이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우울한 때가 많았다고 했다.
반면 궁색한 살림이라도 정리 정돈이 잘 된 집에 사는 어르신들은 훨씬 밝은 표정과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외국에서 발표된 2015년의 한 연구에서는 정리 정돈이 잘된 환경이 개인의 자존감을 높이고, 이는 전반적인 정신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깨끗이 정리된 공간에서 다시 만난 어르신들은 이전과는 달리 환해진 모습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자신이 환경을 관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노후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조 현 주 l 한국편의증진연구원(코이지) 대표. 시니어 대상 홈케어 콘텐츠・플랫폼 개발. 저서 ‘부모님을 위한 나들이 안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