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1531년,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고원지대에 한 무리의 백인 군사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일꾼까지 합해 168명. 그들은 안데스지역을 통치하는 황제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황제는 이방인들이 알현하러 온 것쯤으로 여기고 수락했다. 황제의 군대는 무려 8만명.
백인들이 황제일행을 맞아 성경을 전달하며 개종할 것을 요구하자 황제는 코웃음 치며 성경을 던져 버렸다. 이것이 공격의 빌미가 된 신호탄, 주변에 매복해 있던 화승총과 3문의 대포가 불을 뿜기 시작했고, 말을 탄 군사들이 달려 나왔다. 남미인들은 난생 처음 접하는 총과 대포소리에 혼비백산했다. 무섭게 돌진해오는 커다란 말도 낯선 괴물이었다. 기겁한 원주민들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고, 백인들은 그 뒤를 따라가며 칼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칼에 죽은 수보다 서로 짓밟고 넘어가다 몸이 으스러지거나 질식해 죽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낮부터 시작된 도륙은 해가 져서야 멈춰졌다. 7,000여 구의 시체가 산을 이뤘다. 호위대가 나름 결사적으로 막아섰으나, 황제 아타우알파는 생포됐다.
찬란했던 잉카제국은 탐험대장 피사로가 이끄는 168명의 스페인 군대에 의해 어처구니없는 멸망의 서막을 열고 말았다. 마야문명이나 아즈테크문명보다 더 발달한 잉카문명의 수준은 당시 유럽을 능가하고 있었다. 고원지대임에도 완벽한 관개시설로 대규모 농사를 지었고, 우수한 토목기술로 곳곳에 도로와 수로를 건설했다. 석조건축물은 정교하고 견고했다. 금, 은, 동기가 제작되고 의술도 뛰어났다. ‘600여 년 전 잉카제국의 뇌수술 생존율이 자그마치 80%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나올 정도였다.
잉카의 치명적 약점은 단지 무기의 발달만 뒤쳐졌다는 것. 그것이 위협용에 불과한 화승총 소리에 기절초풍하게 된 이유다. 그들이 다른 지역과 교류하며 다양한 정보를 습득했다면, 고작 168명의 중대급 군인들에게-사단을 넘어 군단급에 이르는-8만명의 대군이 패퇴하는 치욕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1명당 400명씩 붙어도 이길 싸움을 허망하게 내준 원인은 ‘공포’였다.
아메리카대륙엔 흑인이 많다. 북미든 남미든 가리지 않고 흔히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원래 아메리카 원주민이 흑인이었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아메리카 흑인의 뿌리는 아프리카. 그들은 백인들이 개척시대에 사냥해서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끌고 온 사람들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라 불렸던 진짜 원주민을 노예로 삼았으면 훨씬 수월했을 텐데 머나먼 아프리카대륙에서 대대적으로 흑인을 강제 이주시킨 이유는 원주민들이 몰살됐기 때문이다. 정복자들이 의도적으로 절멸시키고자 한 건 아니었으나,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몰려들어오자 이유도 모른 채 죽어나갔다.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건 피사로의 ‘총’, 아메리카대륙 전체를 몰살시킨 건 유럽의 ‘균’ 즉 전염병이었다고 서술한다. 당시 아메리카는 청정지대였으나 유럽은 이미 수많은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엄청난 희생자가 나왔지만, 이를 견디고 살아남은 몸속엔 항체와 함께 다양한 균들이 숨어 있었다. 이 균들이 무공해지역에 나오자 대대적으로 퍼지며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이다. 홍역, 장티푸스, 천연두 등 온갖 지독한 병들에 한꺼번에 노출되며 손쓸 틈도 없이 여러 부족이 집단적으로 사라졌다.
인류를 대량학살하고 공포에 떨게 만든 대전염병들은 거의 다 동물에 의한 것이다. 유라시안인들이 먼저 전염병에 걸린 이유는 개, 말, 소, 돼지 등 동물을 먼저 가축화하면서 가까이 지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아메리카엔 가축화할 만한 동물이 없었다. 결국 유럽 전염병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95%를 살육했다.
지금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이다. 웬만한 균엔 끄떡없도록 진화(?)했지만, 아직까지 주먹만 한 박쥐 몸속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엔 꼼짝 못하는 게 우리 몸의 저항력이다.
그렇다고 박쥐를 증오할 수 없고, 먹는 사람과 전통을 미워할 일도 아니다. 메르스를 옮긴 낙타는 중동사람들의 소중한 자산이자 가족이고, 조류독감이 무섭다고 모든 야생조류를 없앨 수도 없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무섭도록 빠르지만, 치사율이 다른 균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균과의 공존엔 개인위생이 가장 중요하다.
인류를 위협하는 균의 공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또한 반드시 이겨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만 경계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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