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익 
대한주택관리사협회 경기도회 전 부천지부장 

 

이제 비도 그쳤다. 우리 일행은 햇볕이 따갑기 전에 가능한 많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앞만 보고 계속 달리지만 원하는 만큼의 속도가 나질 않는다. 강원도 쪽은 주로가 단순해 길을 잃을 일도 거의 없다. 44번 설악로를 따라 계속 가면 550㎞ 합강정휴게소가 나올 것이다. 523㎞ 백두산휴게소를 지나고 539㎞ 38선휴게소에 다다르니 오후 1시 30분쯤이다. 이제 3시간 11㎞ 남았다. 

한낮의 햇살은 따갑지만 큰 산도 없고 졸지만 않으면 시간제한에 걸리지는 않을 것 같다. 뱃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배가 또 고파오는데 좀처럼 마트가 나오지 않는다. 38선휴게소가 길 건너편에 있어 지나쳤고 배낭에 넣어 간 미숫가루도 다 떨어졌다. 힘없이 걷는데 마침 뒤에 오던 주자가 과자를 넘겨준다. 반쯤 남아있던 과자를 순식간에 먹으면서 인제대교를 지난다. 이제 인제터널을 우회해 돌아가면 4㎞ 정도 남는다. 
다 왔다는 방심이었을까? 인제터널 지나 인제육교에 다다를 무렵 구미에서 응원 온 후배 회원이 “형님! 왜 자꾸 제자리를 돌고 있는데예?”라며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를 주면서 서둘러야 한단다. 거리는 약 3㎞ 남았는데 이때는 1㎞가 왜 그리도 멀게 느껴지는지. 얼마를 더 달리니 드디어 11CP인 550㎞ 합강정휴게소가 나온다. 제한시간 30분 전이다(12일 14시 5분 도착, 누적 130시간). 
합강정휴게소에 도착하니 춘천에서 근무하는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 강원지맹 소속 양창식 소장이 자원봉사하면서 반겨준다. 그리고 동반주자를 응원 온 인천 부평의 어느 교회 신도들이 사준 밥을 먹는다. 밥은 고맙게 얻어먹었는데 그 다음이 너무 부러웠다. 그들은 마치 마사지 전문가처럼 동반주자를 엎드리게 한 후 둘씩 양쪽에서 어깨부터 허리,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까지 오일을 발라가며 열심히 마사지해준다. 나는 바로 옆 정자 바닥에 누워 그 모습을 부럽게 쳐다본다. 
다시 갈 준비를 하는데 그때 마침 500㎞ 도달 직전 즈음 “한 번 해봐…”라고 말했던 친구가 또 왔다. “잘 왔다. 다리 좀 밟아주라”고 말하며 엎드리니 70㎏인 친구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 마치 겨울철 시골 보리밭 밟듯 골고루 밟아준다. 굳은 근육이 풀린다. 
친구는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오늘 밤만 잘 넘기라”며 힘든 줄 알지만 서두르란다. 나는 진부령 넘어갈 때의 허기를 대비해 매점에서 빵과 음료를 사 배낭에 넣고 12CP인 605㎞ 호국영웅쉼터를 향해 혼자 출발한다. 
그리고 얼마쯤 갔을까. 561㎞ 내설악광장휴게소에서 좌회전하다 갑자기 주로도(주로를 표시한 지도)를 놓고 온 것이 생각난다. 주로를 잃을 가능성은 적지만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조금 불안해진다. 거의 다 왔는데 길을 잘못 들면 끝이기 때문이다. 이럴 땐 다른 주자들과 뭉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밥 먹으러 들어가는 주자들을 따라 나도 식당에 들어간다. 여기가 산에 오르기 전 마지막 식당이란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마사지를 받고 조금 늦게 온 형이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듯 한 소리 한다. “605㎞에서 컷 오프(Cut off)되면 어쩌려고 이렇게 천천히 가느냐”며 빨리 뛰라고 재촉한다. 나는 밥을 금방 먹었으니 조금 걷다가 뒤따라갈 테니 먼저 가라고 하는데 형이 또 화를 내듯 소리친다. 나를 위해 하는 소리인 줄 알지만 순간의 짜증 때문에 나도 모르게 맞받아쳤다. “그렇지 않아도 450㎞에서 페널티를 받아 천천히 가라고 해도 뛸 상황인데 스트레스 그만 좀 주세요!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오!”
예상치 못한 나의 큰 소리에 그 형도 조용하다. 이후 형은 나를 달래며 시간이 많이 지체돼 촉박하니 진부령 정상까지 쉬지 말고 달리자 한다. 우린 그렇게 573㎞ 설악 백담휴게소를 지나 582㎞ 진부령 정상까지 미친 듯이 달리고 달렸다. 한밤중 강원도 산속이나 다름없어 날씨는 추울 정도로 서늘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우리는 너무 더워 상의를 벗고 뛰기로 한다. 맨살에 배낭을 메고 구령을 붙여가며 달리는 우리를 본 주로감독은 그 속도로 계속 가면 충분하다며 안심시키고 사라진다. 
그렇게 진부령 정상까지는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너무 무리였을까. 갑자기 정신이 몽롱하면서 또 제정신이 아니다. 400㎞, 500㎞에 이어 역시 수면부족이 원인이다. 
형은 시계를 보더니 “새벽 1시 40분인데 거리는 23㎞ 남았고 제한시간 약 4시간 30분 전”이라며 “내리막이니 걷지 말고 뛰어야 한다”고 소리친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마치 경마에서 기수가 때리는 회초리에 본능적으로 달리는 말과 같이 형을 앞서 달려 나간다. 왜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뒤에서 뛰라고 소리치니까 그냥 뛰는 것인데 정말로 지겹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산중이라 추워서 걸을 수도 없다. 
내리막만 23㎞다. 아무리 뛰어도 끝이 없는데 뒤에서 그렇게 소리치던 형은 따라오지 않고 더 이상 뛰라는 소리도 안 들린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형은 고관절과 발바닥 통증으로 진통제를 4알이나 먹어 그 부작용으로 졸음과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조금만 늦었다면 시간제한에 걸려 실격될 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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