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고

양창익 
대한주택관리사협회 경기도회 전 부천지부장 

찢어진 우의를 버리고 새로 우의 두 개를 사서 이중으로 입는다. 추위에 특히 약해 추가로 핫(Hot)파스를 허리와 어깨 그리고 양 무릎에 붙이고 다시 주로에 나선다. 그런데 또 잠이 문제다. 400㎞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붙였어야 했는데 스피드가 없는 나는 매번 시간에 쫓겨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이 자꾸 감긴다. 잠은 추위도 이긴다. 옆의 동반주자를 따라가는데 자꾸 그의 등을 내 머리로 박는다. 또 길가 수로에 빠진다. 이번엔 그냥 빠지는 게 아니고 엎어졌다. 손이 까졌고 핸드폰도 물에 빠져 그 뒤로 통화가 안 된다. 고장 났다. 이것이 나중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졸려서 도저히 못 가겠다고 생각한다. 졸린 상태에서 가봤자 갈지자로 가거나 제자리에서 맴돌기 때문에 1시간에 2km 정도밖에 못 간다. 비가 오니 길에서 잘 수도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심성기 소장이 동반주자와 지나면서 주덕역 화장실에서 자고 온단다. 그런데 심 소장 허리가 피로골절로 새우처럼 한쪽으로 크게 휘었다. 심 소장도 이번에 완주하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데. 걱정이 된다. 약 2㎞ 이상 지나왔지만 우리도 주덕역 화장실에서 자기로 하고 뒤로 돌아 화장실에 왔는데, 도시의 공중화장실도 그렇지만 시골인 충주 주덕역 화장실은 더하다. 악취는 물론이고 바닥은 소변인지 빗물인지 물이 흐르지만 우리는 가장 안락한(?) 자리에 누워 두 시간만 자기로 하고 핸드폰으로 알람을 맞췄다.
그런데 세상에.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그만 알람 소리를 못 들을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이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주자들에 비해 5시간이나 늦게 출발하는 것이니 정말 큰일이다. 둘은 여기서 승부를 보자 다짐하며 450km 9CP를 골인점으로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뛰기로 한다. 
얼마를 달렸을까, 주로 감독이 “앞으로 42㎞, 7시간 남았는데 언덕이 많아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가능한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고장 난 핸드폰을 감독에게 맡기고 계산해 본다. 대회 규정상 450㎞에서는 제한시간보다 30분 늦게 도착해도 CP장이 판단해 주자건강에 문제가 없으면 실격시키지 않고 대회를 계속 진행할 수 있다. 단 30분 페널티를 받는다. 이 규정을 감안하면 7시간 반이 남아 있으니 최선을 다하면 들어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 둘은 무조건 달리기로 한다. 
그런데 400㎞에서 450㎞ 구간은 밤 시간대 산길이 대부분이고 마트도 없어 400㎞ 전인 주덕역 주변 마트에서 먹을 것을 배낭에 잔뜩 지고 가야 하는, 대회 구간 중 최악의 구간이라 먹는 것이 최고의 문제다. 아무리 좋은 차도 연료가 없으면 1㎝도 못 가는 것처럼 사람도 똑같이 배가 고프면 발이 나가질 않는다. 그리고 몸의 약한 부분부터 아프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대회 1주일 전 대회에 참가하는 동료 2명과 함께 400㎞에서 500㎞ 구간에 물과 죽, 복숭아넥타를 검은 봉지에 담아 10km 단위에 교차로 표시된 전봇대 아래 풀숲에 숨겨 놨다. 그걸 믿고 배낭을 가볍게 해서 갔는데 이걸 어쩌나! 숨겨 놓은 지점을 찾는데 예초가 돼있고 먹거리가 안 보인다. 아마도 예초꾼들이 예초하면서 찾아 먹은 것 같다. 그렇지만 다행히 예초하지 않은 구간도 있어 2개는 찾았고 그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밤새 소태재와 양안치재를 넘어 달리기를 계속하니 어느새 새벽이 밝아온다. 시계를 보니 쉴 수도 걸을 수도 없다. 얼마를 더 왔을까, 441㎞ 지점인 연세대 원주캠퍼스 앞을 지난다. 앞으로 9㎞만 더 가면 9CP인 450㎞다. 아침 출근시간이 되자 원주도 차로 붐비기는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다. 벌써 햇살이 따갑다. 그렇지만 쉴 수 없으니 계속 달려 우산동 1군 지사를 지나는데 앞에서 어떤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사람이 핸드폰 카메라로 나를 찍으면서 달려온다. 다가가 보니 부천 옥길지구에서 근무하는 이영성 소장이다. 순간 눈물이 나오려는데 참았다. 대회 전부터 연차 내 응원 오겠다고 했는데 정말 온 것이다. 같이 동반주해 450㎞에 도착하니 제한시간에 17분 늦었다(11일 13시 57분, 제한시간 13시 40분, 누적 103시간 57분, 30분 벌칙). 최종 150시간 이내 골인해야 하는데 30분 벌칙을 받았으니 적어도 골인지점에 149시간 30분에는 들어가야 벌칙 30분을 합해 150시간으로 완주가 인정된다. 
이 소장이 삼계탕과 죽 그리고 발의 열을 식히기 위한 얼음과 물통을 가져왔다. 나는 샤워를 한 후 삼계탕을 먹으면서 얼음물에 발을 담가 열을 식힌다. 먼저 온 주자들은 잠을 자고 떠났지만 나는 여기서도 시간에 쫓겨 잠을 못 자고 그냥 출발해야 한다. 이 소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다시 10CP인 500km 강원 홍천의 파레스가든을 향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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