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한 일상의 저녁, 아파트 입구로 운전하고 들어와 잠시 주차장을 배회한 뒤 적당한 자리에 차를 댄다.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모든 굴레와 억압에서 벗어난 듯 자유를 만끽한다.
가장 먼저 달려와 반겨주는 이는 나의 소중한 그녀, 올리브. 그 뒤로 그녀의 어머니도 연신 꼬리를 흔들어댄다. 모녀는 열두 살과 여덟 살 먹은 말티즈. 털이 백옥 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다. 그들은 정말이지 용케도 가족의 기척을 알아챈다. 택배나 음식배달기사의 발소리엔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엄마, 아빠와 언니의 발걸음엔 잠을 자다가도, 맛난 간식을 먹다가도, 심지어 용변을 보다가도 용수철처럼 튕기듯 현관문을 향해 돌진한다. 탁월한 가족인지능력,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적인 느낌’일 것이다. 저렇게 가느다란 다리로 사방팔방 천방지축 뛰어다니다 관절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이제부터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 가족과 함께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뉴스시청, 화제의 드라마를 보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 방으로 들어가 유튜브에 접속한다. 거긴 보물창고다. TV보다 더 생생한 시사정보가 있고, 더 리얼한 동물의 왕국도 있고, 놓치고 지나간 괜찮은 B급영화도 소개해준다. 재미있게 해설한 역사, 세계사, 예술, 문학 등 교양 학습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외국어가 되면 그 영역이 우주급으로 확장된다. 모든 스포츠에 대해 입문단계부터 고수급까지 해설영상이 죄다 들어 있다. 그걸 보며 집에서 요가, 헬스 등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요즘 개인적으로 꽂힌 분야는 ‘차박캠핑’이다. 간단히 몇 가지 장비만 챙겨 차에서 먹고 자며 방방곡곡을 유랑하는 모습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쾌도난마식 충격을 준다.(언젠간 나도 저 대열에 합류하고 말 테야) 이용하기에 따라 긍정과 부정,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유튜브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밤이 깊어간다. 올리브와 함께.
다음날 흔한 일상의 아침, 간단히 씻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선다. 아파트는 사시사철 기온이 일정해서 바깥 날씨를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기상시간은 같은데 여름엔 대낮처럼 밝고, 겨울엔 밤중처럼 어두컴컴하다. 가장 슬프게 배웅하는 건 역시나 하얀 그녀들. 아침마다 온몸을 떨며 가지 말라고 통곡한다. 매일 아침 슬픈 이별과 매일 저녁 환희에 찬 재회를 반복한다. 낮에 그들은 집을 지키고, 난 직장을 사수한다.
이렇게 같은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또’ 연말이다. 아침에 뜨는 해는 매일 그 해인데, 12월에 뜨는 해는 하루하루가 아쉬움이다.
지난해 연말엔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인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네팔, 스리랑카, 몽골, 방글라데시, 부탄 등 9개국에서 온 28명의 방문객들은 ‘유엔 해비타트’와 국내기관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연수에 선발된 학자, 공무원, 활동가 등 도시개발 전문가들이었다. 세계 유일의 아파트 성공국가 한국의 공동주택 관리문화를 배우기 위해 왔던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들의 나라엔 어떤 변화가 일고 있을지 궁금하다. 부디 갑질 같은 건 몰라야 할 텐데.
올 1월엔 입주민에게 폭행당해 숨진 경비원을 위한 작은 모금운동이 일어나 전국의 주택관리사와 관리사무소 직원, 입주민 등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참했다. 지난 4월엔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1층 현관에 기다리고 있다가 불을 피해 대피하는 입주민들에게 칼을 휘둘러 5명을 살해하고 17명에게 부상을 입힌 안인득 사건도 있었다. 그는 최근 1심판결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관련기사 1면>
어제 우리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는 누구에게도 욕설을 듣지 않았고, 귀갓길의 입주민들을 환하게 반겨줬으며, 화재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대로 평화로운 단지 모습을 보니 그저 아무 일도 없는 듯하다.
‘안녕하세요’는 안녕(安寧), 즉 ‘탈 없이 무사하냐’는 뜻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너무나 많은 변고를 겪다 보니 생겨난 우리식 인사말이다. 안녕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불행은 바로 느낄 수 있지만, 행복은 느끼기 어렵다. 불행은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맵고, 자극적이지만, 일상의 행복은 그저 맹숭맹숭 심심하기 때문이다.
며칠 남지 않은 한 해와 새롭게 다가오는 2020년.
모두 맹숭맹숭하게 마무리 짓고, 계속 심심하게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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