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석  입주민
서울 성북구 정릉e편한세상

 

내가 이것을 꿈꾸고 버킷리스트에 담아두고, 뜸을 들이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하는 데는 단 4박 5일이면 충분했다. 
‘할리데이비슨 몰고 전국 일주하기’는 나의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이다. 환갑이 가깝게 다가온 쉰아홉 살, 정년퇴직을 코앞에 두고 인생 2막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열대여섯 가지 리스트 중 이것이 가장 가슴을 뛰게 하는 항목이었다. 그러나 정년 후에 운 좋게 이어진 새로운 일자리에서 일에 또 매달려야 했기에 이 꿈은 노트 속에 글 한 줄로 그냥 잠들어 있었다. 
드디어 예순여덟에 은퇴했다. 숨어서 잠자고 있던 버킷리스트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곧바로 ‘2종 소형’ 면허를 땄다. 250cc 이상 대형 모터사이클을 몰려면 이 면허를 따야 한다. 그리고 내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 할리데이비슨을 장만하는 사치를 부렸다. 인생 1막에서 땀 흘리며 일하느라 수고한 나 자신에게 주는 통 큰 은퇴선물이었다. 대한민국 대형 지도를 벽에 붙여두고, 머릿속에 전국 일주 여정을 그려보며 뜸 들이기 시작했다. 지도에 달린 길은 붉은 형광펜으로 칠했다.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까지는 거의 형광색이 칠해졌다. 그러나 칠순이 지난 나이에 혼자서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전국 일주하는 것은 좀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라이딩하려면 날씨가 도와줘야 한다. 춥지도 않고, 미세먼지도 없고, 비가 오지 않아야 한다. 전국의 일주일 일기예보를 분석하며 D-데이를 정했다. 모든 것을 꼼꼼하게 챙기며 준비를 다 했다. 
드디어 디데이 아침이 밝았다. 나는 법적으로는 노년이 분명하지만 마치 초등학생이 소풍가는 것처럼 마음은 들뜨고 가슴은 쿵쾅거렸다. 두꺼운 청바지에 검은색 가죽 재킷, 라이딩 부츠에 가죽장갑, 선글라스로 무장하고 헬멧을 썼다. 두두둥~ 할리 특유의 엔진음을 뿌리며 서울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시원스럽게 열려있는 세상의 길은 오직 나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4월 중순의 벚꽃 가로수는 아직도 꽃잎을 다 털어내지 않고 도열해 내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드넓은 세상 한복판 쭉쭉 뻗어있는 넓은 길을 나와 할리는 거친 숨소리를 내뿜으며 비호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서울 출발-천안 독립기념관-충주 청남대 대통령 별장-공주 마곡사-금강 백제보-부여 백제문화단지-내가 자란 부여군 옥산면 소안동 고향마을과 초·중학교 교정-충남 서천-군산 선유도-대장도-새만금 방조제-전주 한옥마을, 풍남문-남원 광한루-담양 죽녹원-메타세쿼이아 길-광주-영암-해남 땅끝 마을-완도-보성 녹차 밭-순천만 습지-진주 촉석루-부산-울산 방어진 대왕암 공원-주전 몽돌 해변-경주 문무대왕 수중릉-구룡포-포항 호미곶-영덕 강구항 대게마을-울진 금강송 숲길-단양 도담삼봉, 만천하 스카이웨이-횡성-원주-양평-서울 귀환. 
이것이 4박 5일간의 국토 종·횡단 라이딩 여정이었다. 계기판을 보니 2,100km가 찍혀있다. 제주도 빼고 대한민국 모든 도를 두루 달린 셈이다. 대개 국도는 제한 속도가 70㎞였다. 그러나 모든 국도는 마치 고속도로와 같았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취해서 달리다 보면 제한 속도를 한참 넘길 때도 많았다. 5박 6일로 계획했던 일정은 비 때문에 하루를 줄여야 했다. 빗속에서 우비 입고 홀로 라이딩은 너무 위험하기에 거제도 하루 일정을 뺐다. 그러나 4박 5일간 국토의 남북과 동서를 꿈꾸던 대로 다 누볐다. 계획엔 십 년이 걸렸지만 그것을 이루는 데는 다섯 날이면 충분했다. 삶에서 실행의 중요함을 다시 느낀다. 무엇이든 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 2막, 소유의 삶이 아니라 실행의 삶을 살 것을 또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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