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와 아기 고라니

열린세상 오정순l승인2019.10.23 09:28:27l114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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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순 수필가

하얀 털이 복실복실한 강아지 한 마리와 중년의 귀농 부부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에 고라니 새끼 한 마리가 탯줄을 매단 채 쓰러져 있다. 안주인은 얼른 고라니 새끼를 데리고 들어와 젖병을 물리고 따뜻하게 감싸서 목숨을 건져냈다. 고라니가 살아난 것이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워서 부부는 물고 빨며 애정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강아지가 어느 날부터 벌렁 드러누워 고라니에게 젖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주인이 아끼는 대상을 자신도 아껴야 한다는 판단이 서자 착한 강아지 코스프레를 시작한다. 고라니 새끼는 나오지 않는 젖을 물고 이리저리 뒤채더니 어미인 양 가까이에 두고 졸졸 따라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강아지가 젖을 물리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긴 주인이 고라니의 입을 열어보니 어느새 이가 나서 강아지의 젖꼭지를 물어 그 대리 젖사랑도 끝이 났다. 강아지는 연신 도망다니기 바쁘고 고라니는 버림받은 것이 낯설어서 따라다니는데, 강아지가 귀찮으니 쇼파로 뛰어올라가서 피한다. 
고라니는 어찌라도 ‘강아지 어미’의 교육법을 익혀 날마다 점프를 시도해 어느날 쇼파로 올라갔다.  이를 지켜본 주인은 겁이 더럭 났다. 이제부터 고라니로 살아야 하는데 강아지 습속을 익히면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날로 구조센터에 데려가 문의를 했다. 이들의 사랑이 고라니를 오히려 무기력한 동물로 전락시키는 것과도 같다고 지적을 당했다. 살려낸 것은 잘 한 일이나 이럴 경우에는 구조센터로 데리고 와야 한다고 했다.  
이제 고라니와 주인 그리고 강아지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그러자니 주인은 고라니에게 더 깊은 정을 주고 싶어 안기도 하고 뽀뽀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강아지가 중간에 끼어들어 막는다. 모성으로 위장했던 착한 강아지 코스프레가 드러나고 만다. 
4살배기 아이가 아우를 보고 나서 매 순간 아이와 엄마 사이를 가로막듯이 주인의 사랑을 뺏어간 고라니에 가는 주인의 시선과 손길을 차단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고라니는 고라니 세계로 가야 한다니 강아지에게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을 것이다.  날을 잡아 고라니를 구조대로 떠나 보내면서 주인은 눈물 바람으로 돌아선다. 그 눈물의 끝에 누가 있는지 강아지는 알지만 고라니가 동료 고라니들에게로 간 것은  한동안 눈에 밟힐 것이란 추측이다. 싫었고 엄마로부터 떼내고 싶었을 지라도 정이라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강아지를 위해 물개박수를 쳐줬다. 주인이 좋아하는 고라니를 사랑하는 길이 자기가 살 길이라는 것을 터득한 강아지는 지혜로웠지만 독차지하던 사랑을 뺏긴 시간이 얼마나 쓰고 아픈 시간이었을까. 
나는 큰 딸로 태어난 ‘강아지’였다면 남동생은 없다가 생겨난 ‘아기 고라니’였다. 아우가 백일이 됐을 때 6·25 피란길에서 늑막염을 앓았으니 어머니의 지극 정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라니는 고라니 세상으로  떠났지만 내 동생은 어머니에게 다시는 아파서는 안 되는 장남으로 ‘보호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강아지인 나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해야 내가 살 것이란 판단 아래 그 세월을 강아지가 뒤집어 젖을 내어주듯이 내 욕구를 누르고 남동생을 위해  뭐든 채워주면서 때때로 시선을 가로막느라 죽도록 수고를 했다. 이뤄져서는 될 일이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는 동생이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러고 나면 생각만으로도 죄스러워서 더 잘 해주곤 했다. 
산 것들의 먹이 쟁탈, 사랑쟁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면역의 뿌리는 바로 억압이나 방종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교감하며 성장하는 것이라니, 내가 가을에 슬쩍슬쩍 외로움을 타는 것은 근원이 내 역사의 뿌리에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온갖 대상에게 무의식이 투사돼 등장할 때마다 의식이란 뜰망으로 건져내 나를 성숙시키는 즐거움이야말로 노년의 쾌재다. 가을의 말에는 깊이가 있다. 인생은 바로 어린 짐승에서 성숙한 사람이 돼가는 여정이다. 
강아지는 종종 함께 지내던 아기고라니가 보고싶지 않을까. 가로막던 존재가 사라져도 그 빈자리로 그리움이 담긴다. 

오정순  kslee@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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