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光陽)은 이름처럼 일 년 내내 햇살이 머무는 고장이다. 
구례에서 하동을 거쳐 광양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다. 이 길은 사철 흐름을 멈추지 않는 섬진강 물길과 함께 달린다. 섬진강 옆으로는 4개의 계곡을 둔 백운산(1,218m)이 우뚝하다. 광양의 삭막한 이미지를 부드럽고 온화하게 바꿔주는 강이고 산이다.  
맨 먼저 들른 곳은 매화마을(다압면 도사리). 팝콘 같은 새하얀 매화꽃은 져서 볼 수 없지만 이즈음에 찾으면 연갈색으로 변해가는 드넓은 매실밭을 구경할 수 있다. 매화마을 한가운데는 매실 명인 홍쌍리(70) 여사가 일군 6만평 규모의 매실농원이 있다. 농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섬진강과 매실마을 풍경이 참으로 절경이다. 도란도란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 저쪽은 경남 하동땅이다. 매실농원 중앙에는 매실을 담그기 위해 놓아둔 수천 개의 옹기들이 들어차 있다. 

▲ 수어호
▲ 중흥사

풍치 아름다운 산과 계곡 

매화마을에서 나와 다시 섬진강길을 따라간다. 백운산(1,218m)으로 가는 길이다. 산협으로 뻗은 4개(남쪽의 동곡계곡, 서쪽 성불계곡, 북쪽 금천계곡, 동쪽 어치계곡)의 계곡은 언제 찾아도 웅숭깊다. 정상에서 보는 조망도 탁월하다. 지리산의 장쾌한 마루금과 광양만이 가슴 가득 안긴다. 
어치계곡으로 간다. 4개의 계곡 중 가장 깊은 곳에 있지만 접근성은 편리하다. 수어호를 지나면 12개 마을(비촌, 평촌, 탄치, 지계, 외회, 내회, 어치, 죽림, 신전, 웅동, 신황, 구황)로 이뤄진 백학동이 나오는데 어치계곡은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계곡 깊숙이 들어가면 사람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원시림이다. 계곡 상류 바위절벽을 타고 내리는 구시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다. 한낮에도 이슬이 맺힌다는 오로대며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선녀탕도 만날 수 있다. 
백학동 들머리에서 바라본 백운산 억불봉은 마치 한 마리 학이 살며시 내려앉은 모습이다. 억불봉은 위치에 따라 또는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인다던가. 자비로운 미소의 불상처럼 보이는가 하면 사람이나 동물의 얼굴 형상으로도 보인다. 지계마을에서 보면 바구리(바구니)를 엎어 놓은 것 같아 억불봉을 두고 이곳 사람들은 바구리봉이라 부른다. 
어치계곡에서 나와 옥곡면 소재지를 지나 옥룡면으로 간다. 백운산은 그 기세가 이곳에도 미쳐 그 한 자락에 백계산이란 걸출한 산 하나를 만들어놨다. 백계산 남쪽에 있는 옥룡사지로 가는 길.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 년 불교의 성지다. 도선국사는 원효, 의상, 지눌과 함께 우리나라 대표 고승으로 입적할 때까지 35년간 이곳에 머물렀다. 옥룡사는 화재로 소실돼 터만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창건 당시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도선국사가 심었다는 동백나무는 사철 푸름을 잃지 않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곳에 늘어선 7,000여 그루의 동백나무는 국내 최대 규모인데 매년 3월이면 옥룡사지 일대가 붉은 동백꽃으로 뒤덮인다. 
신라 경문왕 때 도선이 창건한 중흥사도 근처에 있다. 중흥사는 고요하다. 경내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12호)을 바라본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느낌이다. 임진왜란 이후 폐사와 중건을 거듭하다 1963년 중건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호국사찰로, 당시 승병들은 왜병과의 싸움에서 모두 전사했다. 절집 위쪽의 저수지(중흥제)를 지나 중흥산성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갑자기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몸과 마음에 푸른 기운이 그대로 스며든다. 짧아서 아쉽지만 청신한 기운이 밀려드는 편백나무 숲길을 터벅터벅 걷는 맛이 좋다. 
백운저수지를 끼고 광양읍내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매천 황현(梅泉 黃玹) 선생의 생가를 만나게 된다. 조선 말기 시인이며 문장가였던 황현 선생은 1855년 이곳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 삼재(三才)로 불렸을 정도로 출중했던 분으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나라가 혼란을 겪을 당시 부패한 관료사회에 실망한 나머지 구례 월곡마을로 낙향해 독서와 시문 짓기, 역사 연구에 몰두했다. ‘매천야록’과 ‘오하기문’, ‘봉비기략’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0년 9월 10일 구례 수월리 자택(대월헌)에서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 유당공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땅 

광양읍내로 간다. 광양만으로 흘러가는 서천(西川)을 끼고 돌아가서 만난 유당공원(버들못)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다. 나무 그늘에 앉아 한담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팝나무, 팽나무, 수양버들, 느티나무 등 400∼500년 묵은 고목들과 연못이 있는 유당공원은 조선 명종 2년(1547년) 당시 현감이었던 박세후가 읍성을 쌓은 후 바다에서 보이지 않도록 숲을 만든 것이다. 숲 한쪽에 우뚝 선 이팝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유당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엔 장도장의 맥을 잇고 있는 광양장도박물관이 있다. 장도는 칼집, 주머니칼, 칼자루, 은장도(銀粧刀), 목장도(木粧刀)를 통칭해서 부르는 말로서 칼날을 섭씨 800℃의 열에 달궜다가 식히는 공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다. 칼의 특성상 재료를 고르는 것부터 꼼꼼함이 요구되며 섬세하고 끈기 있는 손 기술이 필요하다. 광양 장도를 일군 박용기(1931~2014)씨는 광양에서 70여 년 장도를 만들어왔다. 광양은 삼국시대부터 철이 많이 나와 칼을 만드는 데 유리한 조건이었는데 박용기 선생은 열네 살 때 이웃에 살던 장도 장인 장익선에게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 박종군(57세,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씨가 장도 기술을 배워 대를 잇고 있다. 
길은 광양만을 끼고 뻗어 있다. 광양만은 한때 전국 최대의 김 생산지로 유명세를 탔지만 제철소가 들어서고 바다가 오염되면서 옛 명성을 잃고 말았다. 광양만은 조선시대 김양식이 처음 시작된 곳으로, 태인동에 김 양식법을 처음 개발한 김여익 공을 기리는 시식지(유물전시관과 사당)가 있다. 김여익은 산죽과 밤나무 가지로 김 양식을 창안했다고 한다. ‘김’이라는 명칭도 김여익의 성에서 따왔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에는 섬이었던 태인동(태인도)은 섬진강과 광양만이 만나는 지리적 특징 때문에 예부터 각종 수산물 양식의 최적지로 꼽혀왔다. 

▲ 망덕포구

윤동주의 자취가 어린 망덕포구

태인동에서 길은 하동 쪽 망덕포구로 이어진다. 태인대교를 건너 망덕포구에 이르면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이 펼쳐진다. 포구 앞으로 보이는 솔숲으로 둘러싸인 배알도라는 섬이다. 덕유산이 보인다 해서 붙여진 망덕(望德)이라는 이름도 시정이 넘친다. 섬이 건너편 망덕산을 향해 절하는 형상이어서 ‘배알(拜謁)’이라고 부른단다. 망덕포구는 가을철 전어로 유명한 광양의 유일한 포구다. 망덕포구는 시인 윤동주(1917~1945)의 자취가 어린 곳이기도 하다. 망덕포구 한편에 있는 낡은 가옥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윤동주 시인의 보석 같은 작품들이 숨겨져 있던 곳이다. 

김초록  여행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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