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정순  수필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할 때 나는 시간이 그리웠다. 돈이 부족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나는 돈이 그리웠다. 
시간과 돈만 넉넉하면 뭐든 잘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도 넉넉해지고 돈도 쓸 만큼은 있는데 왜 빨리 하려고 애를 쓰고 과정을 접고 결과를 빨리 얻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해 봤다. 
그 결과로 시간을 벌지 않고 삶의 질을 벌자는 생각으로 일상을 재정비해 본다. 요즘 나의 머릿속은 쓰레기 문제가 걸리적거린다.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새벽 배송’ 쇼핑을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편리하기는 하나, 마음이 불편하다. 형편상 이용하지 않으면 사는 게 힘든 젊은이들에게는 환영받을 일이나 나는 선택에서 제외시켰다. 편의주의를 배격해야 행복지수가 높아질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관찰하고 생각을 정리해 본 결과다.  
어느 날 남편이 커피를 타다가 내 책상에 놔준다. 고맙다고 목례를 하고 홀짝 마셨다. 글을 쓰는 동안 흐름이 깨지지 않아서 고마웠다. 그러나 그 빈도수가 높아지자 나는 무슨 재미 하나를 잃어버린 것처럼 다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한 절차를 밟는다. 행동 하나하나가 느낌으로 이어지면서 완성에 이르는 것 같았다. 전기포트에 물을 부으면서 쪼로록 물소리를 듣는다. 코드를 꽂으면서 제대로 꽂기 위해 집중하게 되고 내가 마시고 싶은 찻잔을 고르면서 이강소, 고흐, 기네스 등등의 인물을 만난다. 찻잔을 고르고 마실 준비를 한다. 차 한잔의 호사는 누릴만한 나이가 됐다. 다 추억이 서린 찻잔이다. 커피를 고른다. 드립할까 하다가 최근에는 이과수 커피를 선택하고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더듬는다. 폭포 앞에서 튀는 물방울을 맞은 기분을 상기하고, 너무나 좋아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한 곳이기에 극과 극은 그렇게 가깝다는 말에 동의를 하는 순간이었다.  
한잔의 커피타임은 여유의 시간이 된다. 조용하게 움직이지만 생각은 천리를 달리고 시공을 초월한다. 남이 모르는 나만의 색으로 채색되는 충만한 시간이다. 커피라는 물질만이 아니었다. 과정이 생략돼 진정한 커피를 마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서 다시 작업을 하는 날이 허다하다. 
주의 깊게 살펴 보니 과정이 생략된 일상은 나에게 깊게 행복감을 주지 않더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어머니의 생일날 풍경이 달라지면서 나는 그 변화를 감지했으나 나만의  일상이 아니라서 느끼고만 말았다. 어머니에게 선물은 자식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말소리를 내며 섞이는 분위기, 가족들이 정겹게 움직이는 모습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선물인 거였다. 음식점에서 전문가의 솜씨로 맛나게 상을 차려내도 어머니는 그리 웃지 않았다. 
물자가 풍부해지고 자식들도 나이가 들어서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다과를 집에서 하자고 건의를 해 전통식 생일상은 사라졌다. 돈은 돈대로 들었는데 어머니에게 해드린 것이 없는 듯 허전했다. 좁은 식당에서 어머니가 어디에 앉아있는 줄도 모르게 존재감 축소의 분위기를 거쳐 집에 오면 예전의 그 뿌듯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행복감은 서서히 줄어만 갔다.
대체로 생략된 것들이 너무나 많고 결과물만 눈앞에 펼쳐지면 그 행복의 부피감도 줄어든다. 묘목에서부터 키운 화초에서 꽃을 보는 즐거움과 꽃이 핀 화분을 사다가 두고 보는 꽃이 다르듯 그렇다.
그래서 가능하면 걸어서 쇼핑을 하는 편이다. 오고가는 길에서 예전과 다른 묘한 차이를 느낀다. 핸드캐리어를 끌고 쇼핑을 다녀오는 날, 나는 거리에서 박세리를 생각했다. 골프선수들이 허벅지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무거운 것을 끌고 산으로 오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가방을 끌고 언덕길을 오를 때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희열을 느꼈다. 일상의 공간이 헬스장으로 변한 기분이 들었다. 방향을 정하고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는 따라오지만, 결과만 취하는 데 길이 들면 걷지 않고 차 타고 여행 다녀온 듯 기억이 선명하지도 않고 기능도 자라지 않는다. 인생의 보폭을 일정하게 떼며 사고는 시공을 넘나들며 무한정 펼쳐보는 재미, 개성껏 취향대로 살되 묘한 차이를 느낀다면 편리함이 행복감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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