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정순  수필가

사람들이 붐비는 버스터미널에서 낯선 사람이 인사를 하는데 도무지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저를 아시나요?”
“그럼요. 그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면 안 되지요.”
“무슨 목소리요?”
그녀는 지자체 행사인 문학 강연장에서 내 목소리에 반했던 청중이라고 고백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연의 성패율이 목소리에 좌우된다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현실로 다가드니 놀랍다. 
언젠가 완도로 여행을 갔을 때 약국주인이 벌떡 일어나면서 내 이름을 들먹인 적이 있다. 매주 한 편의 글과 함께 사진이 실렸기에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단 한 번의 강연을 듣고 목소리를 기억해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아는 척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인사를 애써 기억까지 찾아주면서 알아봐준 그녀가 진정으로 고마웠다.  살면서 다른 사람들이 개인에 대해 피드백해주는 조건은 각기 다르다. 부드러운 눈매로 웃어줄 때의 인상이 남는가 하면, 선하고 큰 눈을 껌벅거리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뽀얗고 부드러운 피부는 좋은 인상으로 다가든다. 이목구비는 안중에도 없이 좋은 피부로 기억된다.
이렇게 각 특성마다 개성이 달리 표출되는데 무엇보다도 목소리는 오래 돼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개성 중의 개성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듣고도 누군가가 기억나는 것은 정말로 특별한 경험이다. 
갓난이 때는 남녀 구분이 없는데 변성기가 되면 남자와 여자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이는 성대구조가 그다지 다르지 않다가 서서히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성대가 겨우 2㎜에서 커지기 시작하면, 남자는 1년에 약 0.7㎜씩, 여자는 0.4㎜씩 자란다고 한다. 두어 살만 먹어도 목소리만으로 남녀를 대충 구분할 수 있다. 성인이라고 불리는 시기에는 목소리도 안정을 찾고 변화에 둔하다. 노인이 되기 전까지 목소리만으로는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엇비슷한 것 같아도 모든 사람은 지문(指紋)과 성문(聲紋)이 다르다.  
성문은 남녀의 차이가 확연하다. 남녀가 전혀 다른 주파수의 소리를 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하지만 기계를 통과한 목소리는 조금 낯설다. 왠지 내 목소리가 아닌 듯 낭낭하기도 하고 고음으로 들리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나의 목소리는 기계음에 강하다. 원 목소리가 대체로 맑은 편인데다 성량이 풍부한 편이 아니라 마이크를 사용하면서 목소리의 톤을 낮추면 훨씬 듣기가 편해진다. 
나는 육성에 수필이라는 마이크를 통해 내 인생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 인생, 내 목소리, 내 수필 거리의 누군가가 내 목소리를 기억하듯 내 수필을 기억해주려면 내 인생의 개성이 뚜렷해야 하는 것, 그 개성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시간의 의미를 느낀다.  
어느 학원에서 등록을 하려고 이름을 적는데, 혹시 ‘그림자가 긴 편지의 저자’냐고 물어왔다. 그는 국어과목 학원강사였다. 첫 작품집이라 애정이 깊은데 얼마나 감사한 증언인가. 내 인생의 목소리에 반응한 그녀의 피드백은 한동안 글을 쓰는 내게 힘이 돼 줬다. 
나는 그 때 이후 공중파 인물을 거리에서 만나거나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을 때는 “당신을 알아봤어요”란 사인으로 가벼운 목례 정도로 표현을 해준다. 유명인이 아닌 경우 알아봐주지 않은데 대한 서운한 감정을 여러 번 들어서,  알면 응원 차원에서 피드백을 한다. 괜시리 뒤에서 힐긋거리고 수군대는 것보다 훨씬 인간애가 느껴진다. 사랑받은 사람은 경험을 살려 사랑할 줄 안다. 먼저 사랑하면 누군가도 사랑받아 본 경험자가 될 것이기에 표현한다. 성당의 문화행사 차 종종 음악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때 참여한 성악가나 연주자들에게 나는 가감 없이 좋은 피드백을 한다. 
“어머, 무슨 목소리가 그렇게 좋은가요.”
“시설도 미비한 곳에 연주를 그렇게 잘 하나요. 잘 들었습니다.” 
내가 들어 본 피드백 중 최고는 “회원님에게 배정된 제 이름 아래 ‘그대는 행운아’라고 적혀있는 거예요” 였다. 전해주는 목소리에도 성품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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