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봉화군 분천역-승부역 트레킹

 

오랫동안 기차로만 연결되던 마을들이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들 사이로 낙동강이 흐르고 마을과 마을은 물길 따라 산을 넘어 걸어 다녀야 했던 오지. 그 길을 따라 걸어 본다.

승부역은 1999년 환상선 눈꽃열차가 운영되기 시작하면서 자동차로는 접근할 수 없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지역이라는 이름으로 인기가 높아졌다. 막연한 동경으로 찾았던 오지! 겨울이면 눈이 펑펑 내릴 것 같은 그곳에서 사람들은 따뜻한 가슴이 돼 돌아왔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이니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라는 과거 어느 역장이 지었다는 글이 새겨진 비석 옆을 열차가 가끔 지나간다. 승부는 승부역 외에는 넓은 부지를 찾아 볼 수 없고 몇 가구 안되는 민가들이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산골오지다. 

몇 해 전 울진을 지나 늦은 밤길에 차 한 대 겨우 다니는 비좁은 도로를 따라 이곳을 찾았다. 캄캄한 산골은 불이 모두 꺼지고 밥집도 없고 물도 없어 간이역 숙소에서 어렵게 물 한 병을 구해 길 위에서 라면을 끓여 허기를 때웠다. 잠잘 곳은 고사하고 텐트 칠 자리를 찾아 산 위의 학교 마을 옥수수 밭 사이 좁은 길을 헤매다 지쳐 버렸는데, 한 뼘 하늘에 달이 잠시 걸쳤다가 어느새 산 뒤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캄캄해진 하늘에는 별들만 강물에 떠다니고 여울물 소리가 들리는 강가 도로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매미가 울어대던 승부역 건너편 물레방아 길을 올라 산자락이 시작되는 곳에서 낙동정맥 트레일 표지판을 보며 산과 강이 어우러진 협곡을 걷고 싶은 충동을 어쩌질 못했다.

▲ 비동・양원 체르마트길(비동승강장)의 출발점
▲ 철암-분천을 오가는 V-train

낙동강 세평하늘길 트레킹

낙동강은 승부역을 지나 양원역에서 배바위산 자락을 휘돌아 사행천을 그리며 비동에서 비룡산줄기를 한 번 더 휘돌며 분천역으로 흐른다.
1970년대 벌채가 번성하던 시절, 소천과 울진 등지에서 벌채된 춘양목이 분천역을 통해 전국 각지로 운송됐다. 춘양목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산지에서 자라는 소나무다. 석탄산업이 왕성할 때는 열차도 많이 다니고 벌목이 왕성하자 외지에서 일을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며 자연스럽게 시장이 활성화됐다. 하지만 벌채업의 쇠퇴로 분천역 주변은 한산한 촌락으로 변했다. 그 후 백두대간협곡열차 V-Train의 출발점으로, 한국과 스위스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스위스 체르마트역과 자매결연을 맺으며 2014년 12월 분천역 일대가 산타마을로 조성돼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다. 

▲ 분천역

아기자기한 분천역을 뒤로하고 낙동강을 따라 걸으면 배바위산 계곡의 막다른 길에 비동마을을 만난다. 비동(肥洞)은 옛날 화전민에 의해 개척됐다고 하며, 땅이 기름지다 해 붙여진 이름으로 나무숲이 우거지고 산과 산 사이로는 낙동강이 굽어져 흐르는 지형으로 비동임시승강장에서 양원역이 있는 마을로 가는 방법은 산을 넘어 걸어가야 한다. 
비동임시승강장에서 열차 터널 저 멀리 빼꼼히 보이는 양원역은 2.2㎞밖에 안되지만 자동차로는 30여 분을 돌아가야 한다. 비동·양원역 구간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체르마트 구간이다. 자매결연지인 스위스 체르마트역의 이름을 붙였다. 
철로 옆 인도를 건너 배바위산자락 낙동강을 내려 보며 걷다 물소리가 들리는 경사면을 10여 분 오르면 성황당이 있을 것 같은 산마루에는 시원한 바람이 오름길의 땀을 씻어주고 반대편에서 들리는 낙동강 물소리로 마중한다. 산을 깎아 흐르는 낙동강 암벽의 풍경과 맨발로 흙길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쉬엄쉬엄 걷다 보면 저만치 머리 위로 굽이도는 철로위로 가끔씩 지나가는 기차의 풍경이 반갑다. 

비동과 양원역, 양원역과 승부역은 굽이도는 낙동강과 경사가 심한 산으로 둘러싸여 열차 외에는 교통수단이 없다.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는 자동차로 석포를 거쳐 57㎞나 돌아가야 하는 거리지만 산길과 협곡의 물길을 가로지르면 5.6㎞인 도보길이 형성돼 있다. 
기차 정착역이 없던 시절 승부역에서 내려 험한 계곡길을 걸어 다녀야만 했던 양원역 주변 주민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해 1988년 간이역 허가를 받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작은 시골 간이역을 지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 역사로 경북 봉화군 분천리의 원곡마을과 울진군 전곡리의 원곡마을 사이에 있어 역명은 양쪽 원곡이란 뜻인 ‘양원’이라 이름을 지었다. 
양원·승부비경 5.6㎞ 구간은 깊고 험준한 협곡 사이에 철길 이외에는 접근할 방법이 없던 곳에 길을 만든 것이다.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영동선과 함께 운치 있게 어우러진다. 물소리와 우거진 나무 냄새를 맡으며 아슬아슬한 협곡의 절경을 느낄 수 있다. 분천역에서 승부역까지는 사람의 발길이 없던 곳이라 지명도 별로 없다. 낙동강 상류 협곡을 걷는 여행자들을 위해 세평하늘길 12선경의 설화가 곁들여진 이정표가 오래된 비밀의 협곡을 그나마 지명으로 대신한다. 낙동강 세평하늘길은 트레킹을 통해 마음을 편하게 하는 힐링 루트로 신선들도 살고 싶어 한다는 비경을 따라 총 12.1㎞로 4시간가량 소요된다. 

이성영  여행객원기자(ladder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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