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된 섬, 나오시마

이채영l승인2019.06.26 13:32:58l11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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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카와 카즈하루 ‘털실아트’

일본 시코쿠의 북쪽 세토나이카이의 작은 섬 ‘나오시마’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골의 투박한 섬이었다. 과거 섬 주민들은 주로 염전이나 어업을 주업으로 삼아 생활했다.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구리 제련소가 들어서며 잠시 번화하기도 했지만 제련 산업 쇠퇴와 함께 금세 시들시들해졌다. 제련소에서 배출된 산업 폐기물은 섬의 환경을 빠르게 오염시켰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나갔다. 


 

‘버려진 섬’에서 ‘예술의 섬’으로

나오시마가 ‘예술의 섬’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건 후쿠다케 출판사가 시작한 아트 프로젝트 덕분이었다. 창업자인 후쿠다케 테츠히코의 아들인 후쿠다케 소이치로가 선친의 뜻을 따라 1989년부터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영입해서 본격적인 실행에 착수했다. 섬을 살리려는 기업의 의지와 예술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회색으로 물들어가던 나오시마에 마침내 ‘예술’이라는 꽃을 피웠다. 처음에는 예술 작품으로 섬을 채우던 것이 유명 작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나오시마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해 영구 전시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그 결과 오늘날 나오시마는 ‘현대 미술의 성지’가 됐다. 올해는 나오시마를 비롯한 세토내해의 섬들을 무대로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토우치 국제 예술제(Setouchi Triennale)’가 개최되는 해다. 이번 세토우치 국제예술제2019는 축제 역사상 처음으로 봄(만남의 봄), 여름(모임의 여름), 가을(확장의 가을) 등 시즌마다 테마를 설정해 펼쳐질 예정이다.
 

▲ 쿠사마 아요 ‘노란호박’

바닷가에 외딴 ‘호박

다카마쓰항을 떠난 배는 약 1시간 후 나오시마에 도착한다. 항구에는 설치미술가 ‘쿠사마 아요이’의 작품인 빨간 호박이 탐스럽게 빛나고 있다. ‘검은 점이 무한 증식하는 반복과 통일의 호박은 나오시마를 상징하는 예술품이다. ‘검은 땡땡이 무늬’는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작가는 식탁보의 물방울무늬가 모든 사물에 번져 나가는 환각을 경험한 뒤 온 세상이 점으로 보이는 정신질환을 앓았는데, 점으로 채워진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검은 점을 그리며 자신의 고통을 극복해나갔다고 한다.
나오시마의 또다른 호박은 섬의 남쪽 바닷가 부두에 있다. 푸른 바다를 마주한 호박은 샛노란 빛을 뿜어내며 그 존재감을 뽐낸다. 그저 부두에 점박이 호박 하나가 놓여있을 뿐인데 주변 모든 풍경이 다르게 느껴진다.

▲ 베네세 아트 사이트

땅 속 미술관

베네세 아트 사이트(Benesse Art Site Nao shima)는 일본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추미술관과 미술관과 부티크 호텔이 결합한 베네세 하우스, 이우환 미술관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베네세 하우스는 1992년, 지추미술관은 2004년, 이우환 미술관은 2010년에 생겼다. 

▲ 클로드 모네 ‘수련’을 주제로 조성된 연못

지추미술관은 ‘자연과의 조화’를 특징으로 하는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답게 언덕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한 채로 지하에 지어졌다. 지추미술관에는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의 작품 9점이 전시돼있다. 설계 당시부터 전시할 작품을 미리 정해뒀기 때문에 당연히 미술관의 모든 공간은 이 9점의 작품에 최적화돼 있다. 
담백한 노출 콘크리트와 자연광, 기하학적 구조를 사용한 전시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전시관 안으로 스며드는 자연광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그 빛을 달리해서 작품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한다. 단순히 작품의 감상만 돕는 게 아니라 건물과 전시 작품이 어우러지며 새로운 하나의 작품이 되는 셈이다. 전시관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돼있다.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제한적이다. 신발을 벗게 하거나 관람객의 인원을 제한하기도 한다. 치밀하게 계획된 공간에서 감상에만 몰입하는 것은 무척이나 특별한 경험이다. 
지추미술관에 전시된 월터 드 마리아의 ‘시간/영원/시간없음(Time/Timeless/No time)’은 웅장한 신전 같다. 압도적인 크기의 공간과 그 중앙에 놓인 검은색의 커다란 구체는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흰 벽과 자연광, 이탈리아 대리석 큐브 70만개로 채워진 전시실엔 모네의 ‘수련(waterlilies)’ 연작 5점이 자리하고 있다. ‘빛’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작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에이프럼, 페일 블루(Afrum, Pale Blue: 1968)’, ‘오픈 필드(open field:2000’, ‘오픈 스카이(Open Sky:2004)’ 3점이다. 
작품을 정확히 체험할 수 있도록 작가 자신이 공간 디자인에 참여했다. ‘오픈 필드’의 벽에 비친 사각형은 빛이면서 입체적인 공간이다. 평면인지 공간인지는 빛으로 들어가야만 알 수 있다. ‘오픈 스카이’ 역시 마찬가지다. 출입구를 제외한 벽은 막혀있고 오직 하늘만이 뚫려있다. 공간 안에서 하늘을 마주한 그 순간의 날씨와 빛이 작품을 완성한다. 오픈스카이에서 일몰 시간대에만 진행되는 나이트 프로그램은 지추미술관의 백미로 여겨진다. 지추미술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우리나라 출신의 세계적인 현대 미술가 이우환과 안도 다다오의 협업을 담은 ‘이우환 미술관’도 있다.

 

▲ 혼무라 지구 이에프로젝트 ‘하이샤’

빈집의 의미 있는 변신

항구의 반대편 혼무라는 1600년대 전국 시대에 조성된 마을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조선 초기 즈음이다. 지어진 지 100년이 된 낡은 가옥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다. 평범한 시골 마을로 보이는 이곳 역시 현대 미술의 무대다. 마을 곳곳에는 ‘이에 프로젝트(家 Project)’로 불리는 혼무라 지구 아트하우스 프로젝트가 숨어있다. 일상 속에 스며있는 예술이란 점에서 나오시마의 정체성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혼무라 지구 안에 가도야, 미나미데라, 긴자, 고오진자, 이시바시, 고카이쇼, 하이샤 총 7곳의 아트하우스가 운영되고 있고, 안도 다다오 박물관도 있다. 여행자들은 지도를 따라 골목을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를 빌려서 마을 곳곳에 숨어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채영 여행객원기자 (여행비밀노트 chaey.net)

이채영  kslee@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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