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정순  수필가
 

철이 바뀌면 자동 점화되듯 생각이 피어나는 것들이 있다. 그 철에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몸이 안내를 한다. 이를 테면 저장 마늘 구입하기, 장마 시작하기 전에 오이지와 열무김치 담그기, 김장할 고추 사기 등은 애써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 작동된다. 
내가 ‘청담동 마늘녀’가 된 그날도 전혀 마늘을 살 궁리를 하지 않았는데 외출해서 돌아오다 야채차를 보는 순간 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파장 중인 곳으로 달려갔다. 
마지막 짐을 트럭에 싣다가 그들은 나를 보고 일손을 멈춘다. 
“굵은 마늘이 남았는가요?” 그들은 마지막 남은 한 자루를 팔 생각에 트럭 안에서 꺼내준다. 알이 굵은 정도를 넘어 주먹만 하다. 아마도 코끼리마늘이라고 불리는 품종 같다. 나는 그 마늘을 산 것이 횡재라도 한 듯 기분이 좋아져서  장터를 빠져 나왔다. 
저장 마늘로 산 것이 아니라 구워 먹으면 금방 떨어질 것 같은 데다가 알이 굵어 까기도 수월할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이 안정되고 부자가 된 심정을 공감하는 사람은 주부 경력자들이다.   
그날 따라 오전에 비가 와서 운동을 나가지 못한 터라 기운도 비축돼 있으니 일이 무섭지 않았다. 어디라도 가야 할 것 같아서 카드 갱신을 위해 전철로 한 차례 문제 해결을 하고 돌아오던 터였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마늘 자루를 들고 오다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내려놓고 말았다. 팔이 아픈 게 아니라 허리와 무릎이 아파왔다. 마늘 몇 개를  버릴 셈 치고 끈을 길게 늘여 질질 끌기로 했다. 마늘 자루를 끌고 가는 내 모습에 내가 먼저 빵 터진다. 그 시간대에는 사람도 지나다니지 않으니 거리의 주인공이 돼 웃음기 잔뜩 품고 만화의 한 컷이 돼 천천히 걸었다.    
불과 10m도 채 지나지 않아 겉 비닐은 덜덜거리고 붉은 비닐망사도 구멍이 났다. 이러다가 길거리에 마늘이 쏟아지면 낭패이므로 무슨 수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이때 내 눈에 들어온 곳이 이웃 아파트 경비실이다. 30년 동안 수시로 그 길을 지나다녀서 그냥 아는 사이처럼 돼있다.  
“아저씨 제 마늘 좀 살려주세요.”
경비원이 종이상자를 뜯어다 덧대주면서 연신 웃는다. 
“살다살다 마늘 살려달라는 사람은 처음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마늘이 무사 귀가하길 기원하며 어지간히 웃는다. 
최근 들어 나는 인생을 놀이삼아 웃으며 살자고 생각한 터라 무슨 일이든 코미디 코너의 주인공처럼 돼도 싫지 않다. 그 길은 로데오 거리의 뒷길이라 나처럼 마늘 자루를 질질 끌고 가는 사람은 구경하기도 어려운 곳이다. 
 나는 덧댄 종이 덕에 안심하고 끌고 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으나 고정을 하지 않아서 미끄러져 다시 손을 봐야 하게 됐다. 경비실도 벗어났으니 이제 맡겼다가 승용차로 찾아갈 수도 없고 거리에서 사람을 기다릴 수도 없게 생겼다. 
이때 놀라운 아이디어가 피어났다. 자루의 박은 자리가 닿도록 세워서 끌면 마늘이 상하지 않을 것같아서 종이를 두 번이나 더 구겨서 아래에 덧대고 끌었다. 아주 작은 일인데도 집으로 갖고 가는 동안 생각의 진화를 맛봤다. 그럭저럭 우리 아파트 초입에 다달았다. 멀리서 나를 보고 오는 여인이 웃느라고 걷지를  못한다. 그때 중심을 잃으면서 힘이 달라졌는지 골판지가 비켜간다. 다시 조준해 일어서다가 그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웃지만 말고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이리하여 얻은 사진 한 장을 미국 사는 친구에게 보냈더니 내 입은 옷이나 자기에게 주면 좋겠다고 한다.  엄청 편한 차림이라 내가 그랬을 수 있었다는 것을 피드백에서 증명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일상이 코미디여도 좋다. 어느 날 ‘세상에 이런 일이’에 등장한다고 해도 시와 때를 가릴 줄 아는 처지이니 ‘청담동 마늘녀’가 돼도 좋다. 한 나절 실험적 삶은 끝나고 그날 밤 마늘까기는 힘들었지만 껍질 벗고 나온 마늘을 보는 시선은 따뜻했다. 특별한 인연처럼.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