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아주 오래전, 사회정의가 지하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시절, 교통경찰 1년이면 차가 한 대, 몇 년 더하면 집이 한 채라는 말이 시중에 떠돌았다. 그 말이 사실을 얼마나 반영한 것인지 모르지만, 일반 시민들에겐 틀림없는 것처럼 보였다. 도로에 CCTV가 없었을 때 곳곳에 교통경찰이 숨어 있다가 신호위반이나 불법 유턴하는 차들이 보이면 번개처럼 나타나 차를 세웠다. 그러면 운전자는 의례적으로 지갑을 꺼내 지폐를 건넸고, 경찰은 당연한 듯 수첩에 끼워 넣고는 “안전귀가 하시라”란 말과 함께 거수경례를 올렸다. 음주운전하다가 적발돼도 좀 큰돈이 들긴 했지만 어렵지 않게 무마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도 마찬가지였다. 도로가 산을 끼고 돌아 회전하는 곳에 순찰차를 세워두고 있다가 과속차량이 나타나면 바로 붙잡았다. 금액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택시나 트럭운전자는 생업이므로 5,000원, 자가용 운전자는 (당시엔) 먹고 살만한 계층이므로 1만원. 그 깊은 배려에 나름 합리적(?)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운전자의 입장에서 - 기분 좋을 리는 없지만 -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가끔 만나는 정의감이 투철한 진짜 경찰관에게 걸리면 그보다 훨씬 센 ‘딱지’를 끊어야 했으니까.
어린이들에게 교통경찰은 - 일반경찰과 달리 - 검정색 선글라스와 하얀 헬멧에 긴 부츠를 신고, 엔진소리도 우렁찬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멋쟁이 아저씨였지만, 운전자들에겐 제복을 입은 조폭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세무서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세무서와 소통하면 거액의 세금을 탕감 받을 수 있었다. 이들 모두 작은 예일 뿐, 그때 우리 사회 곳곳엔 그렇게 훈훈한 인정(?)이 넘쳐흘렀다.
또 아주 오래전, 아파트가 귀하고, 아파트에 사는 게 신흥 부유층의 상징이던 시절, 큰 아파트 단지 부녀회장 1년이면 차가 한 대, 몇 년 더하면 집이 한 채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 말 역시 틀림없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이 눈부시게 성장하며 신흥경제국으로 급부상하던 당시, 쓰레기도 돈이 된다는 사실을 순진한 입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아파트에서 돈 되는 일들은 거의 모두 부녀회장이 관장했다. 나중에 입주자대표회의란 단체가 생기면서 일부 아파트에선 부녀회와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관리소장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한때 아파트 소장은 지역 예비군중대장과 함께 퇴역 장교들의 중요한 취업루트였다. 뿐만 아니라 전기나 설비에 대한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소장이 될 수 있었다. 급여가 박했던 소장들 중 일부는 공사나 용역업체로부터 뒷돈 받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민주와 정의가 독재정권의 외피로만 기능하던 시절이 끝나면서 사회가 바뀌기 시작했다. 양아치의 훈훈함을 민주주의의 지엄함이 접수했다.
이제 경찰에게 돈을 건네려면 수갑 찰 각오를 해야만 한다. 세무공무원들은 거액 탈세자를 추적하며 모든 합법적 수단을 동원해 세금을 걷는다. 몇 푼 먹으려다 패가망신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공직기강이 바로 섰다. 공무원 수준이 놀랍게 향상되고, 국민도 편안해졌다.
아파트 역시 크게 변했다. 주택법이 강화되면서 부녀회의 손발이 묶이자 조직 자체가 많이 사라졌다. 남은 부녀회는 진짜 부녀회가 돼 각종 봉사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더욱 진화한 공동주택관리법 제정으로 입주자대표회의의 부정소지도 원천적으로 차단됐다.
주택관리사제도가 도입되면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의 자격요건과 정지 및 취소 등 벌칙조항도 엄격해졌다. 지금의 소장은 예전의 그런 소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소장은 동네북 신세다. 감사지적사항이 나오면 소장이 입대의 보좌를 잘못한 탓이고, 모든 민원의 종착지는 소장을 향하며, 부당한 요구나 간섭을 배제하려면 잘릴 각오를 해야만 한다. 세상은 민주주의의 엄격함과 합리성이 지배하고 있는데, 유독 관리현장만은 전근대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주택관리사법 제정안이 발의됐다.(관련기사 1면) 이 법이 주택관리사만을 위한 법이라고 생각하면 편협한 착각이다. 변호사법은 궁극적으로 법률소비자를 보호하고, 공인중개사법은 부동산 약자를 지켜준다.
주택관리사법은 공동주택 관리현장을 선진화시키고, 궁극적으로 이 법의 최종 소비자인 입주민을 위한 보루로 작동할 것이다. 관리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이 법이 꼭 필요하다.
원칙이 통하면 세상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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