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성숙한 사회일수록 약자에 대한 배려가 생활 속 깊이 배어 있다.
약자라고 하면 어린이와 노인이 먼저 떠오르고, 여기에 여성과 장애인, 극빈층이 포함된다. 요즘은 한발 더 나아가 외국인 노동자, 난민, 성소수자, 종교적 소수자, 이주민 등으로 확대된다. 또 우리 사회에서만 볼 수 있는 북한이탈주민도 사회적 약자로서 안정적 정착을 위한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받는다.
선진국일수록, 삶의 만족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약자를 위한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약자를 위한 복지는 맞춤설계된 것도 있지만, 대개는 모든 국민이 함께 누리는 형태로 이뤄진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약자만을 위한 복지는 자칫 소수의 특권이라는 반감을 부를 수 있고,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 열등감이나 수치심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 아이에게만 ‘공짜밥’을 먹이는 게 아니라 모든 아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하는 것이 단적인 예다.
독일의 교육은 대학까지 무상인데 이 무상교육의 혜택이 외국인에게까지 적용된다는 점은 늘 감탄스럽다. 노르웨이는 대부분의 의료비(1년 30만원까지만 본인부담)가 무료고, 출산 관련 병원비도 국가가 부담한다. 육아에 대한 부담이 거의 없고, 대학원 박사과정까지 무료로 밟을 수 있다. 노후연금, 실업수당, 장애인수당 등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물론 세금이 높고, 물가도 비싸다. 그러나 국민으로부터 걷은 세금을 다시 국민을 위한 보편적 복지에 활용하므로 조세저항이 거의 없다. 오히려 ‘가장 살기 좋은 나라’ ‘내가 어려워져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나라’에 산다는 자부심이 훨씬 강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유럽과 서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대체로 이렇다.
이들이 부자국가이기 때문일까? 국민소득이 한국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탄은 행복한 나라의 원조다. 부탄 헌법엔 국민행복을 정책의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가난한 형편 속에도 무상의료와 교육 등 모든 국민에게 고른 복지정책을 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게 국민행복도 최상위라는 통계로 나오는 것이다.
자살률, 노인빈곤율, 노인자살률, 청소년 사망원인 1위 자살, 장시간노동 등 나쁜 통계로만 OECD 최고수준을 달리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과잉복지는 국민을 게으르게 만들고, 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란 발언이 나오는 건 어처구니없다. 독일과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부탄 국민들조차 비웃을 얘기다.
우리사회의 복지수준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딜지언정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공동주택 관리현장에도 그런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중 한 사례가 ‘임차인대표회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임대아파트에 사는 입주민들은 자신을 대변해줄 대표기구가 없어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단지의 대소사와 경비업체, 청소업체, 소독업체 등 각종 용역업체 선정이나 전기계약방식, 수도요금 부과방식 등에 대해서도 자체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임대사업자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법 개정과 함께 관리문화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임차인대표회의 구성이 의무화되고 여러 현안을 ‘협의’하게 됐다.
그런데 여기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임차인대표회의가 ‘협의’를 넘어 관리권을 장악하고 이권에 개입하며, 초법적 기구로 군림하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관련기사 1, 2면>
분양아파트의 입주자대표회의처럼 소유자 단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더한 권한을 행사하는데도, 법의 미비로 인해 처벌받지도 않는 기묘한 흐름이 번지고 있다.
우리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약자가 많은 서러움을 당하며 살아왔다. 민주화 이후 나타나고 있는 정부와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저항도 과거의 억눌림이 폭발하는 것이다.
최기인의 소설 ‘똠방각하’는 무기력했던 약자가 작은 권력을 획득하면서 벌어지는 세태를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구태 중의 하나인 ‘약자의 완장질’을 적나라하게 그렸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복지제도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작은 완장에 눈 먼 사람들이 물을 흐리면 공동체는 와해될 수밖에 없다. ‘을’끼리의 갑질이 무서운 이유다.
의식의 각성도 중요하지만 법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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