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순 수필가

봄비가 내린다. 꽃비가 내린다. 엊그제는 매화꽃잎 진 자리가 별꽃처럼 아름답다고 해질녘에 찬사를 하며 길을 걷다가 우면동에서 양재역까지 걸었다. 발바닥이 얼얼해도 봄 기운은 좋다. 새 봄으로 와주니 이 또한 복이다. 살아서 걷고, 걸어서 좋고, 좋은 날들이 누적되면 내 인생이 꽃물 들 것이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조만간에 다 지워버릴 꽃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으며 구름송이 같은 벚꽃무리를 향해 인사를 한다. 내가 바빠서 그대를 다시 찬찬히 보지 못하더라도 아름답게 피어줘 고맙다고 웃어줬다.
오늘은 꽃비를 재촉하는 봄비가 내린다. 아직도 꽃봉오리를 채 열기도 전인 목련나무를 전지해 뽀얀 꽃송이가 잘라낸 가지 더미에서 빗물에 젖고 있다. 아파트에서는 정해진 날의 일정대로 전지작업을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잘린 가지를 보며 짠해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두 손을 다 써서 그 꽃봉오리를 구제해야 하므로 비옷을 입고 빗속으로 나가 상처 난 꽃송이들을 구해 손에 쥐고 빗속을 걷는다. 
“상처 입은 꽃송이를 마저 피게 해주리라.”
해마다 이맘때 창 너머 살구나무가 있는 2층집에서는 자신의 아파트가 천국으로 느껴진다던 이의 눈도 호사를 마쳤다. 서럽게 가지를 잘라내 잎이 돋을 때까지 시야가 괴롭게 생겼다. 좋으라고 한 전지작업이지만 우선은 눈엣가시다. 나무를 잔인하리만치 잘라버렸다. 한때 웃으면 한때 울리라는 성서말씀이 살구나무와 마주한 집에도 해당되다니….
어찌 그뿐이겠는가. 조양호의 사망 소식이 짠하다. 아내와 두 딸이 상식 이하의 행동으로 세간의 눈살을 찌뿌리게 하더니 급기야 가장이 세상을 하직했다. 성하지 못한 몸으로 살면서 가족 때문에 얼마나 치욕스러웠을까. 새삼스럽게 친정집 안방에 걸렸던 ‘가화만사성’이라 써진 액자가 생각났다. 
그 액자를 쓸 때, 아버지는 마음에 다지고 실천하고자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조용하고 말수가 적은 아버지는 방마다 액자를 걸었고 그 액자에 쓴 글을 어느 날 동생들에게 물어보니 주의 깊게 가슴에 담고 사는 형제는 없으나 나는 다 외고 있다. 우리 6남매는 부모 앞에서 소리 높여 싸워본 적이 없다. 어찌 한평생 살면서 모두가 다 자신들 마음에 드는 형제자매였을까만 서로 감정을 오므려서 가운데를 비워 화평의 자리를 만들고 오늘에 이르렀다. 
“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좋은 말을 해도 주머니를 넉넉하게 채워주는 아버지가 아니니 말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네가 알아듣고 동생들에게 본을 보이며 오순도순 알콩달콩 살아라.”
지금 우리에게 올 수 없지만 아버지가 우리 집 앞에 와서 벨을 눌러주면 좋겠다. “정순아” 하고 불러주면 좋겠다. 꽃비를 맞으며 아버지와 내가 즐겨 먹던 커피와 카스텔라를 같이 먹으러 가고 싶다. 꽃이 진다고 서러워 말자고, 다음 해에 또 만날 것이니 기다리자고 커피잔을 기울이며 말하고 싶다. 돌아가기 전에 소주 한잔이 벗이라고 할 때도 아버지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혼자 고요히 저수지의 붕어를 그리워하며 봄을 보냈다. 그것이 서운해 지금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조만간에 온천지에 하느님이 영산홍 꽃무릇에게 꽃불을 놓을 것이니 가슴 데일 사람들에게 누가 소방관 역할을 맡을까. 많은 돈을 두고 가는 조양호가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소방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목숨을 내놓고 불을 꺼줄 수 있을까.
어려서는 부모가 반팔자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이 면류관이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조양호 가족들은 면류관은 되지 못한 것같다. 내 아버지는 돈으로 푸짐하게 자식들 주머니를 채워주지는 못했어도 만년에 자식들 때문에 고생하지 않았다. ‘살았을 제 부모’라는 정신으로 극진하지는 못할지라도 자식들에게 섬김받고 보호받고 한평생 멋지게 살다가 갔다. 부활절이면 문인화를 그린 솜씨로 계란에 난을 쳐서 한 바구니씩 어머니에게 안겼으며, 붓이 쉬는 일 없이 틈만 나면 매란국죽을 그려 자식들이 연하장으로 사용하도록 나눠주던 아버지다. 그 아버지가 그리운 것은 매화 꽃잎 진 자리처럼 아버지 인생이 진 자리가 고와서 목소리가 듣고 싶다. 고향에서는 매화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아버지는 하늘로 오른 향내를 맡기나 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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