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인권을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평가받는다. 한국에서도 변호사의 지위는 각별하다.
법 위에 정치군인들이 군림하던 시절, 변호사들은 학생과 정치인, 재야인사, 노동자 등 독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심한 경우엔-그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자신의 목숨을 걸고 치열한 법리전쟁을 벌였다. 변호사 자신이 투옥된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용감하고 강력한 법 논리와 울타리가 없었다면 강제로 투옥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스러져간 민주인사들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1970~80년대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조영래를 첫손에 꼽는다. 대구출신으로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전체수석을 차지하며 법학과에 입학할 만큼 천재적이었던 그는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고교 때부터 직접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고, 수배로 피신생활을 하던 중 일어난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면서 노동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학습량도 엄청나 언론(보도지침 사건), 환경·공해(진폐증 사건), 인권·여성(부천서 성고문사건, 여성 결혼퇴직제 사건), 민사(망원동 수해사건)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변론을 도맡았다.
1990년, 43살에 세상을 떠난 조영래를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의 용기와 강직함, 양심과 강한 활동력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졌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는 노무현이 있다. 상고 출신으로 초기엔 돈 되는 사건에만 관심을 가진 ‘속물변호사’였던 그는 우연히 부산대 학생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나중에 모두 무죄판결)의 변론을 맡고 나서 인권과 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싹틔우며 ‘운동권 길거리변호사’로 180도 변신했다. 당시 야권의 태두인 김영삼의 권유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은 특유의 저돌성으로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는 신화를 스스로 창조했다.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노무현이 가장 아끼는 친구라고 했던 문재인 변호사까지 대통령이 됐으니, 정치성향을 떠나 우리 사회에서 인권변호사가 갖고 있는 위상과 이미지가 얼마나 특별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외에도 홍남순, 홍성우, 김광일, 강신옥, 한승헌, 김상철, 박원순, 박찬종, 이돈명, 이상수, 이석태 등 대한민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한 인권변호사들이 꽤 많다. 나중에 보수와 진보로 갈라져 진영대결을 벌이며 멀어지긴 했어도 1970~90년대의 그들은 하나로 뭉쳐 민주주의를 견인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들이 가진 현재의 정치적 입장과 견해를 떠나,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고도, 험난한 길을 자청해 걸어 들어간 그들의 용기와 양심에 깊은 경의와 고마움을 느낀다.
민주주의가 정착단계에 접어든 지금도 인권의 사각지대가 도처에 널려있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공동주택 관리현장이다. 노동관계법이 잘 정비되고 강화된 현 상황에서도 공동주택 관리종사자들은 사용자 아닌 사용자로부터, 유린 아닌 유린을 당하고 있다. 노동법의 손길이 미치지도 못하는 황야에 경비원, 미화원, 관리사무소장이 무방비로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가진 변호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엔 주로 하자소송에 관여하며 공동주택에 발을 들였지만, 관리종사자들의 열악한 실태를 보며 지원에 나서는 것이다.
지난 4일 열린 함진규 국회의원 주최 토론회에서 법무법인 산하의 김미란 수석변호사는 “공동주택은 직원에 대한 갑질의 발로, 민원의 무덤”이라며 “관리종사자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줄 뒤늦게 깨닫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종사자들 사이에선 한영화 변호사도 많이 알려져 있다.
공동주택 관리현장의 노동환경과 인권실태는 안개 속처럼 희미하고 아득하다. 생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갑질’이란 이름의 유린행위는 법으로 명확하게 판단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자살, 분신 같은 처절하고 극단적인 선택이 나타나기도 한다. 1980년대의 데자뷰다.
이런 현장일수록 인권변호사가 필요하다. 이들의 활약이 관리종사자의 희망으로 활짝 피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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