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강정석  입주민
서울 성북구 정릉e편한세상

발코니 한 쪽의 운동공간이 훤해졌다. 한쪽 벽면에 서 있던 책장이 원목 책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칙칙한 밤색 MDF 합판 헌 책장은 미련 없이 버렸다. 색도 어두운 데다 선반의 가운데가 처지고 휘어 있었지만 기왕에 사용하던 물건이니 바꿔볼 생각은 하지 않고 무심하게 그냥 사용하던 책장이다. 볼품없는 헌 책장을 들어낸 자리에 원목 책장을 놨더니 발코니의 모양새가 한결 깔끔하고 환해진 것이다. 책장의 양면과 다섯 개의 선반엔 나이테가 타원형 무늬로 여러 겹 근사하게 새겨져 있다. 이것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온 것이다. 전 주인이 폐기물 모으는 곳에 버렸으니 그냥 뒀다면 폐기물 소각장 굴뚝 연기로 사라졌을 것이다. 요행히 내 눈에 띄었기에 알뜰한 주인을 새로 만나서 제 몫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우리 아파트는 매주 일요일이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일이다. 나는 일주일간 모은 재활용 쓰레기를 종류별로 구분하며 버리고 있었다. 그때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버려진 나무 책장 한 개가 눈에 들어왔다.  내 키와 비슷한 5단짜리다. 때가 조금 묻어 있었지만 멀쩡했다. 원목의 질감도 은은하고 크기도 적당했다. 경비아저씨에게 물으니 가져가도 된다고 했다. 집에 와서 책장 놓을 자리 치수를 쟀다. 크기가 딱 안성맞춤이다. 혼자서 낑낑대며 집까지 겨우 옮겨 왔다. 이웃집 사람이 보면 주책 떤다고 할 것 같았다. 아내는 마침 집에 없어서 궁상떤다는 잔소리는 안 들어도 됐다. 남이 버린 헌 가구를 들고 오는 내 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땅에 부딪혀 흠집이 생기지 않게 들고 오느라 힘이 더 들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로 8층까지 옮겨오는 동안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책장을 발코니에 뉘어 놓고 물걸레로 묵은 때를 닦아내니 원목의 질감이 더 선명해졌다. 그런데 뒷 판이 들떠서 앞뒤로 꿀렁거린다. 합판을 고정한 철심 여러 개가 불쑥 삐져나와 있다. 펜치로 솟아오른 철심을 다 뽑아내고 조그만 나사못을 돌려 박았더니 단단하게 고정돼 짱짱해졌다.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원목은 자연과 시간이 만든 것이라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좋다. 진짜는 모조품과 다르게 가치가 변함없다. 첨단 인쇄 무늬를 인조 합판에 붙여도 가짜가 진짜가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젠 헌 책장을 버려야 하는데 조금 번거롭다. 인터넷으로 신고하고, 배출번호를 붙이고 정해진 장소에 배출해야 한다. 수수료 6,000원을 계좌 이체하고, 배출번호를 큼직하게 써 붙이고, 정해진 곳으로 끌고 왔다. 아스팔트 바닥에 닿은 채로 끌고 왔더니 가짜의 진실이 흉하게 드러났다. 톱밥의 모습을 감추고 있던 나무무늬 비닐이 찢겨지니 숨어 있던 추한 모습이 보였다. 그곳엔 버려진 침대와 의자 등이 보였다. 물자가 흔한 세상이 됐다. 아직 충분히 쓸 만한 가구들이 산더미처럼 버려져 있을 때도 있다. ‘이렇게 흥청망청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발코니의 내 운동공간은 소박하다. 실내 자전거와 완력기, 아령이 있다. 그리고 구석에는 주워온 원목책장이 서 있다. 3층 칸에 미니 오디오를 얹었다. 창문 밖으로 정릉 숲과 남산타워가 보인다. 자전거에 오르며 오디오 CD 버튼을 눌렀다. 베토벤 월광 소나타가 경쾌하게 흐른다. 원목 판이 스피커소리를 살려 음질이 더 좋아진 것 같다. 주워온 원목 책장 하나가 내 헬스장을 업그레이드 했다. 오늘은 재물 운이 있는 날이다.
“어이 좁쌀영감! 버린 책장 하나 주워온 게 그렇게 좋아?”
속으로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