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순  수필가

살다 보면 잊혀지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강론도 있습니다. 내 나이 31살 때 들은 강론이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잡아주고 있지요.
어느 마을에 약간 어리숙한 머슴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청을 거스를 줄 모르고 살면서 답답하면 나무에 올라가 노을 구경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부터 그를 찾다가 없으면 나무 위를 쳐다보게 됐고 어김없이 그는 홰에 오른 닭처럼 나무 위에서 노을을 보고 망중한이 돼 있더라는 이야기지요. 
주인은 머슴에게 한계가 왔다는 것을 알고 머슴살이를 면해 주기  위해 신통치 않지만 밭뙈기를 내주며 독립을 시켰습니다. 그는 자기 소유의 밭이 생긴 것이 좋아서 날마다 밭에서 살았다지요. 돌을 골라 밭을 비단처럼 가꾸고 거기서 나온 돌로 밭 가장자리를 정돈하며 신바람이 납니다. 
그러나 주변에는 언제나 남 잘 되는 것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 그들은 머슴이 돌을 치우기가 무섭게 다른 데서 돌을 가져다 그 밭에 던져 놨지요. 뭉친 흙을 다 부숴 곱게 다듬어도 하룻밤만 자고나면 난장판이 되는 겁니다. 그래도 그 머슴은 하느님께 감사하다고 합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주님, 제가 혼자 경계석을 주워올 수가 없으니 이웃사람들이 이렇게 던져주는 군요.”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연신 그 돌로 경계를 이쁘게 만들어갔습니다.
놀리는 사람의 심리는 앵앵거리며 덤빌듯 날뛰어야 흥미를 느끼는데 그 머슴이 저항없이 콧노래를 부르니 하다가 재미가 없어 그만뒀지요. 
그러나 놀리는 사람의 심보는 한번이라도 투정부리는 것을 보고 싶은 악이 발동 걸리는 겁니다. 이번에는 분뇨를 던졌습니다. 냄새는 진동했지만 머슴은 또 하늘에 감사를 하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어찌하여 저의 사정을 이리도 잘 꿰고 혼자 거름 충당을 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이웃을 통해서 보내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동네사람들은 그 머슴 놀리는 일에서 손을 뗐습니다. 재미가 없는 거지요. 
인고의 세월도 견딜 만큼 견뎌야 덕으로 돌아오지 단 한번으로는 불가능하며 시험 삼아 하는 일에는 덕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종 남 잘 되는 것을 심통내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트집 잡기 일쑤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 강론을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남이 던지는 흉과 욕을 거름으로 삼고 살면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네 자존심이 긁히면 잘 참아내지 못하지요. 중심을 잡고 살다가 답답하면 나무 위에 올라가 노을을 보듯, 우리에게는 위로의 하느님이 있으므로 기도 안으로 들어가서 높이 올라가 만나보는 겁니다. 
돋아오른 새순 하나에 감탄사 수백 개를 얹고 싶어 나는 오늘 서울 숲으로 갑니다. 봄을 맞으며 “얼마나 좋으면 이리 좋을까요”라는 인사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생명을 건강하게 유지한 자의 특권이지요. 이미 내 손자 손녀가 새순 시기는 지났으므로 저들에게서도 욕망의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합니다. 7살배기 막내 손자가 5,000원을 주고 제 아빠에게 만원으로 바꿔 달라고 떼를 씁니다. 돈의 크기와 힘을 아는 거지요. 미운 7살로 보이지는 않아도 어린이 나름의 머리가 핑핑 돌아간다는 이야기이지요. 돌이켜보니 우리네 세월 속에도 저런 냄새가 깃들었지요. 세뱃돈을 어머니가 빌려달라고 해도 절대로 손에서 내놓지 않으려고 하다가 강제로 반납을 한 그늘진 세월이 있지요. 
 띵똥, 문자 메시지가 날아듭니다. 여동생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이제 삼우제를 지낸다는 교우의 연락이 옵니다. 객지에서 동생을 불러 이웃하고 살다가 보낸 언니의 심정이 읽혀 마음이 아립니다.  오늘도 나는 7층 아파트 창으로 가서 한참 노을을 봐야겠습니다. 물 올리지 못하고 고사한 ‘사람나무’를 생각하며 하늘을 향해 영혼의 안식을 빌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생명을 다 태우지 못한 채 보내는 일은 힘듭니다. 그들에게는 결혼해 멀리 사는 자매가 아니라 이웃에 두고 살피며 산 한 가족 같아서 더욱 애잔하기만 합니다. 
 어느새 내 가슴이 노을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잊힐 만하면 찾아드는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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