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손이 하는 일 중에서 별것 아닌 듯하나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연필 깎기를 들고 싶다. 깎는 작업을 통해 맑아진이미지를 만나고 훈련의 정도에 따라 고르고 예쁘게 다듬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울러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집중도가 극에 달하고 힘을 고르고 적당하게 사용해야 하므로 수양의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의 취미가 연필 깎기인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하루의 일과도 연필 깎기로 시작하고 스트레스가 가중될 때는 다스로 사다가 연필을 깎아 필통에 저장하기도 하고 꽂아두기도 하면서 깎는 작업을 자신의 감정을 조율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깎아서 무엇을 만들어낸다는 것보다는 목적 없이 깎을 수가 없으므로 완성미를 갖춘 형상을 정하고 작업을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여성의 다리미질이나 수놓기와 효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종의 심리치료 작업인 셈이다. 
연필심이 닳는 동안 깎인 자리는 지저분해지고 새로 받은 시간이 지저분하게 얼룩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연필 자루를 깎아내면서 새로운 심을 돋우고 나무향을 맡으면서 집중하는 작업은 정신수련이나 같다.  
우리 시대의 학창 시절에는 누구나 필통에 칼과 지우개, 연필이 들어 있었지만  연필깎이 도구가 우리 곁으로 오는 사이에 아이들은 하나의 기능을 연마할 필요성을 잃어버렸다. 섬세한 손길을 무엇으로 길들일지 모를 정도로 기계화돼 연필 깎아주는 정의 길도 막혀버렸다. 
신학기가 되면 아버지가 자식들의 필통을 열고 낱낱이 연필을 깎아 담아주면서 당부하는 모습은 훈훈한 풍경으로 남아있지만, 지금은 연필깎이 도구를 사주면 그만이다. 어른과 아이 사이에 정겨움은 사라지고 기계의 기능으로 문제 해결만 하고 마는 현실이다. 소위 기를 섞어 분위기를 만드는 풍경은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깎는 솜씨에 따라 신부의 평이 달라진 것은 사과 깎기다. 이 또한 집중하지 않고는 이상스럽게 살을 베어내는 바람에 다른 사람 앞에서 조신하게 칼질을 할 수 있도록 길들이는 것이 신부수업이던 때도 있었다.  한편의 수필을 쓰면서 문장을 갈고 다듬어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살려낸다면 문장가는 될 수 있어도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감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예술품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단어를 조립했다는 느낌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필은 경험을 토대로 쓰인 글이라야 읽히는 힘을 얻는다. 사람의 손으로 잘 깎은 사과나 연필이 아니라 기계로  깎아 개성을 죽인 모양새로 말쑥하게 태어나는 연필에서 우리는 감동을 받지는 않는다.  
요즈음 나는 깎아내는 작업을 통해 기도의 맛을 살려낸다. 누군가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고 싶고, 촛불 앞에 앉으면 안정감이 들어서  참 좋다. 새 초를 두 대 촛대에 꽂았는데 자꾸 불이 꺼지고 잠시 켜 있다가 다시 불꽃이 작아지는 것을 보면서 기도할 맛을 잃어갈 즈음, 과감하게 다 타지 못한 부위를 깎아내봤다. 불꽃이 후욱 올라왔다. 오래 꽃을 보여 주지 않던 난촉에 꽃이 피는 듯 황홀해졌다. 나는 주기적으로 초를 깎아내는 게 이제 일상이 됐다. 그리고 기도 생활은 평온을 찾았다. 이 작업을 통해 얻은 게 있다면 굳이 깎아내지 않아도 그 심지에 걸맞게 불꽃을 내면서 초를 태우는 굵기를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의 초나 한 번의 인생에서도 깎여 나가는 것 없이 온전히 다 태워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욕심이었다. 불꽃을 위해 깎아내는  것으로 해결했다. 깎아내는 동안 내 손길은 기술자의 손길을 닮는다. 빗나가지 않게 정교하게 칼을 다룬다. 베어 나가는 초를 보면서도 묵상을 한다. 
깎은 것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용될 수 있는 재료이므로 불꽃이 살아날 수 있을 정도만 수고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든 덜어내고 잘라내고 깎아낼 때 불꽃이 크게 올라왔던 것도 생각해냈다. 맞다. 얼굴에 볼 살이 빠졌을 때 내 콧대는 상대적으로 높아 보였고 내 눈도 커 보이는 것이 생각 났다. 
깎으면서 연필심이 드러날 때의 쾌감이나, 불꽃이 올라오는 쾌감이나, 의욕이 올라오는 쾌감이나 하나의 이치로 굴러간다. 아직도 내 인생에서 깎아내 다른 곳에 쓸 것들이 많다. 시간과 재능, 물질과 기도 등을 가능하면 정교하게 깎아내며 불꽃을 피우리라. 빛의 시간을 만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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