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하게’ 행동하도록 교육받는다. 착한 사람이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학교와 사회에 잘 적응하며, 인생을 잘 살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쁜 사람’이란 평을 받으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 오죽하면 조폭의 어깨에도 ‘착하게 살자’는 문신이 새겨져 있을까.
그런데 그런 교육이 오도되면 나약한 소시민을 양산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강자의 부당한 횡포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는 ‘순둥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봉건시대의 교육이 그랬고, 독재시절의 교육이 그랬다.
신하는 임금을 받들어야 했고, 천민은 양반 귀족을 모셔야 했다. 국민은 대통령과 재벌이 무슨 짓을 벌여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야 ‘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착하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지, 남이 내게 위해를 가해도, 내 권리를 침해당해도 참고 순응하는 게 아니다.
다행히 우리 민족은 그런 식으로 착하진 않았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악한 폭압 속에서 온 민족이 떨쳐 일어났다. 엘리트도, 민초도 일어섰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분연히 일어섰다. 유관순 ‘누나’로 대표되는-지극히 남성편향적 시각에서 바라본-여성들도 주체적으로 뛰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유관순 ‘열사’다.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다. 친일파 잔당들이 아직도 은연중 들먹이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우리 민족 스스로 개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고,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 우리의 독립 의지와 국내외의 결사항쟁이 없었다면 일본이 패망했어도 어딘가의 속국으로 남게 됐을지 모른다.
봉건·독재교육이 아무리 세뇌시켰어도 동학혁명이 일어났고, 4·19혁명과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이 정신이 6월 항쟁과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정신분석학 용어 중에 ‘착한아이증후군’이란 게 있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착한 아이를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영어로 ‘Good boy syndrome’이란 이름이 붙은 걸 보니 서양이라고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착한 아이’는 화가 나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부탁을 거절하지도, 싫은 티를 내지도 못한다. 다른 사람이 우선, 나는 항상 나중이다. 상대방이 잘못했어도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
‘착한 아이’는 ‘착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착한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는 말이 있다. 착한 척 연기해 온 사람이 모든 상황을 견디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그래서 ‘더 무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불안하다.
우리 사회에 ‘갑질’이 만연해 있다. 유독 공동주택 관리현장에서 더욱 심한 양상을 보인다. 관리사무소장은 얻어맞고 쫓겨나기 일쑤고, 경리직원은 희롱의 대상이며, 미화원은 멸시의 눈초리를 견뎌야 하고, 심지어 경비원은 죽임까지 당한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다.
‘착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다. 밖에서 연기하며 수모를 인내한 사람이 안에서 약자에게 폭발하기 때문이다.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또 정에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사회다.
‘착함’을 강요받는 사람은 언제든 악마로 돌변할 수 있다. ‘척’하는 ‘착한 시민’은 필요 없다.
밖에서든 안에서든 불의한 것에는 맞서 싸워야 한다. 연기하지 말고 정정당당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인격에는 갑과 을이 없다.
이게 3·1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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