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짤막한 구절이 숱한 예술인과 문학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영화 제목이나 드라마의 대사, 책 제목에까지 등장한다. 시인 서정주는 바람 대신 꽃으로 말하고 있다.
“무슨 꽃으로 문질렀기에 이리도 살고 싶은가.”
‘문질렀다’는 단어에서 우리는 이미 기억에서 향내를 불러온다. 사람을 살리는 바람, 생기에 향이 깃들면 향기가 될 것이니 과연 시인은 시인이로다. 보이지 않지만 살게 하는 힘, 바람에 깃든 향내를 나는 오늘 진하게 만났다. 
건강하게 잘 살아볼 것이라고 따끈해진 서재 의자에서 엉덩이를 뗀다. 모자와 목도리, 장갑까지 야무지게 장착하고 지하도를 향해 간다. 걷고, 땀을 내고, 사우나로 갈 참이다. 지난해에 브루나이에서 4일 정도 지내고 오니 몸이 한결 겨울나기에 좋아서 인공적으로라도 덥게 만들어서 브루나이와 맞갖게 만들어 볼 셈이다. 
‘뼛속까지 덥혀 오리라.’
지하도로 진입해 걷다가 개찰구에 이르니 커피향이 기분 좋게 반긴다. 어떻게 해볼 수가 없이 황홀하다. 마셔서는 도저히 이 맛을 느끼지 못할 만큼 향내를 감당키 어렵다. 젊은 날 3.1빌딩 뒷골목의 풍경이 기억에서 피어난다. 환풍기로 뿜어져 나오는 커피향 때문에 잠시라도 멈춰 섰던 그곳이기에 나는 두리번거려 본다. 혹시 인공 향기를 뿜어내지는 않는지 찾아본다. 아무리 향내의 진원지를 찾아도 특별한 것이 짚이지 않는다. 다시 걷는다.
“커피와 불고기, 고구마는 내리고 구울 때 피어나는 향으로 맛의 승부를 걸어야 해.”
지하에서 생산되는 향기는 산화하지 못해서 지하에 오래 머문다. 커피향이 편의점 근처를 맴돌다 사라지는 날과 달리 멀리까지 냄새를 밀고 가는데 반대편 출구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맞부딪히는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더 나아가거나 흩어지지도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문이 없이 오픈된 편의점에서 반복해 커피를 내리니까 향이 그치지 않고 생산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커피를 내리는 한, 나는 지하도에서 커피향을 맡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며칠 동안 향내를 맡으러 나갔으나 나는 맡지 못했다. 커피향이 실종됐다고 신고하고 싶었다. 걷기 위해 지하도로 불러내는 촉진제라고 생각했는데 시간대가 다르게 나가봤지만 그 후로 단 한번 향내를 만났다. 그 날 바람은 없었다. 오히려 푸근했다. 그렇다면 커피를 내리는 횟수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좋은 느낌의 사람이 그 다음에 만났을 때 전혀 그날의 그 느낌과 다를 때의 서운함을 닮았다. 그래도 좋은 기억은 지울 수가 없지 않은가. 편의점은 향내를 선물하는 것이 아니고  봉사정신이 강한 것도 아니다. 다만 커피를 내려서 팔 뿐이고 사람은 살면서 인격으로 향내를 풍길 뿐이다. 어쨌거나 뿜어냈으니까 내가 맡은 거다. 인격의 향내처럼. 
상상을 품고 경기고등학교 쪽으로 걷는다. 이번에는 고구마 굽는 냄새가 발목을 잡는다. 종종 그곳에서 따끈한 종이봉지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을 봤기에 미소를 짓고 지나갔다. 
‘고향 냄새에 졌구나.’
그러나 아무리 좋거나 나쁜 냄새도 오래 그 냄새와 같이 있으면 이내 동화돼 냄새를 의식하지 못한다. 감미롭거나 황홀하게 느끼는 사람은 금방 들어왔다는 증거다. 내가 같이 살면서 내 남편에게서 풍기는 인격의 향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갔다가 돌아와야 새롭게 느끼는 것처럼. 
시인들은 바람과 꽃향기로, 나는 웃음기로 생기에 향을 얹는다. 어느 오래 산 어른이 날더러 남편과 사이좋게 잘 살고 있다고 얼굴에 쓰였다고 말해준다. 어느 인생인들 쓴맛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정치인을 욕하면서 자기 욕구불만을 털어내지도 않고, 마땅치 않아도 남 탓을 하지 않으며, 투덜거리지 않으니 그 인격적 면모가 나는 좋을 뿐이다. 내 옆지기는 확실히 지하도의 커피냄새를 닮았다. 어느 날 문득 진하게 향내를 풍기다 사라져도 이따금 맡을 때가 있으니 나는 좋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점점 시인이 되는 남자 사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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