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오늘도 안내 방송이 들린다. 
“주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 공동주택 가구 내 흡연으로 인한 민원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특히 화장실 환풍기는 해당 라인 전체가 연결돼 있어 흡연 시 이웃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니 삼가 주기 바랍니다.” 
잔소리처럼 매일 방송이 들려 알아보니 담배 연기 때문에 못살겠다고 관리실에 민원이 들어왔단다. 이웃끼리 소송을 할 수도 없으니 매일 방송이라도 해 달라고. 
담배 연기는 어릴 때부터 맡아오던 터라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안방의 재떨이는 항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아버지는 거리낌 없이 안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재떨이에 재와 꽁초를 버렸다. 하루 한 번씩 재떨이를 비우는 건 내 몫이었다. 투명한 유리로 된 재떨이를 깨끗이 닦아 빛에 비춰 보면 영롱한 빛이 그 속에서 반짝 빛나서 신기했던 예쁜 모양의 그릇. 우리가 쓰는 그릇보다 모양이 특이했고 유리로 돼있어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던 재떨이는 집집마다 귀한 찻잔처럼 방바닥에 놓여 있던 대접받는 그릇이었다.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마주앉아 담배 한 대 권해서 피우고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했다. 담배 사러 가는 심부름을 곧잘 했던 나는 거북선, 청자, 솔 등의 담배이름에 익숙해 있었다.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 과자도 하나 얻을 수 있는 기쁨도 한몫 했으므로. 거북선 한 보루씩을 사 장롱 위에 올려놓고 아끼는 사탕을 하나씩 빼 먹듯 아버지는 담배 갑을 하나씩 빼서 담배를 피웠다.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화로를 끼고 앉아 긴 장죽에 담배를 손으로 꾹꾹 눌러 넣고 화롯불로 불을 붙여 담배를 피웠다. 한번 쭉 빨면 장죽 끝에서 빨간 불꽃이 점점이 일어났다 스러지곤 했다. 하얀 머리를 비녀로 쪽지고 얼굴은 우글쭈글 이빨 빠진 할머니가 긴 장죽을 입에 물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는 모습은 전설 속에 나오는 할머니 같아 두렵기도 하고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장죽으로 한 대 맞을까봐 겁도 나고. 다 피운 재를 화로에 탕탕 털던 할머니, 장죽이 신기해서 할머니 몰래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해보면 장죽 끝에서 나던 역한 담배 냄새. 담배를 느긋이 피는 할머니 옆에 이불을 덮고 앉아 하루 종일 책을 보고 있노라면 벽장 속에 숨겨 뒀던 곶감을 하나씩 꺼내 주곤 하셨다. 그 곶감의 달콤함이 할머니에 대한 두려움을 다 씻어 줬다. 
아들을 낳아 시댁에 갔는데 시아버님도 갓난 아이 옆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웠다. 남편 같으면 잔소리라도 할 텐데 그럴 수도 없고 가급적 멀리 아이를 뉘어 놓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남편은 몰래 나가 담배를 피우고 있고  아버님은 50여 년 피우던 담배를 어느 날 끊었다고 한다. 연유가 궁금해 물으니 보건소 직원이 매일같이 전화를 해서 오늘은 몇 대를 피웠는지 확인하고  관리를 했단다. 
아파트 발코니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던 남편은 내가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듣지 않더니 윗집 아주머니 항의 한 마디에 밖에 나가서 피우게 됐다. 십여 년 잔소리한 아내보다 윗집 아주머니의 한 소리가 무섭나 보다.    
같이 밥을 먹고 나면 남자들이 한쪽에 모여 담배를 피우며 그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삼국지에서 ‘차 한 잔 식을 시간’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은 그들에게 꼭 필요하니. 밥을 먹으며 술을 마시며 친해지는 한국 사람들의 정서는 담배를 피우면서도 들어가야 하나보다. 연기를 흡입하며 느끼는 만족을 함께 누리고 싶어서일까. 담배를 피우며 연대를 느끼는 걸까.  
길을 가다 보면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이 모여 죄지은 듯 구부정하게 앉거나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걸 보면 불쌍해 보인다. 구석진 건물 뒤에서 눈치 보며 피우고 있는 그들은 예전의 화려했던 지난날의 위상을, 테이블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재떨이의 당당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걸까.  
지난날 나를 위해 구름 도넛을 만들어 주던 옛 사랑의 기억도 담배 연기처럼 흩어져 간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