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복지관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남자 회원이 나를 불러 세운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얇은 선물 봉투를 내민다. 주춤거리는 나를 보며 옛날이야기를 한다. 
“선생님은 저에게 처음으로 세뱃돈을 준 사람이잖아요. 너무나 고마워서 그 아름다운 봉투를 독서대 뒤에다 붙여뒀습니다.”
나는 봉투를 받아 들고 집에 돌아와 열어보니 내가 마음에 담고 있는 머플러가 거기 들어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본 것처럼 신기하다. 17년 차의 정이니 이제는 가족 같은 이들이다. 
나는 매주 목요일이면 시립장애복지관으로 간다. 중도장애인반의 글쓰기 교실을 맡고 있지만 내적 치유를 우선으로 하는 교실이다. 처음 그 교실을 맡을 당시에 나는 전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컨디션을 가진 때였다. 두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고 내게는 내적 자유가 주어져서 누가 봐도 아름다운 상태였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는 노래를 부를 시기였다. 그런 나를 본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어렵사리 교실 두 곳을 열어 열정을 쏟기 시작하던 교우가 갑자기 지방으로 이사를 가면서 나에게 인계해 주기를 부탁했다. 믿고 부탁을 하는데 나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린이반 글짓기 교실과 장애인반 문학동아리를 맡아 하다가 임자를 만나면 인계하라고 작정하고 일단 맡았다. 
나는 두 교실에 진심을 담아냈다. 사람이 늘고 정원의 두 배가 돼버렸다. 입소문을 타고 학부모가 개입을 하는 사례가 늘자 나는 어린이 교실이 싫어졌다. 오직 사랑하고 그 아이들의 재능이 잘 자라도록 돕는 일에만 열정을 쏟다가 변수가 생기자 나는 3년을 기점으로 그만뒀다.    
중도장애인반 교실은 매주 목요일 하루를 그들과 함께하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지 어언 17년차다. 느닷없이 찾아온 뇌 병변으로 인생이 허물어지는 일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세상 어디에서도 사랑으로 그들을 반기는 곳이 적다는 것을 안 나는 그만 둘 수가 없었다. 단계적으로 커리큘럼을 짜서 그들을 수렁에서 건져내기로 했다. 비록 몸은 성치 않아도 마음은 온전한 인격체로 살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단 하루도 그 교실에 가면서 웃지 않은 날이 없고 가기 싫은 날이 없었다. 나의 진심은 직원과 교실 회원들이 더 잘 안다. 문학과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지도를 거듭하면서 문학상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고, 등단한 작가로 활동을 하기도 하고, 뒤늦은 공부로 학구열을 불사르기도 한다. 뇌성마비 장애인끼리 사랑해 결혼을 하기도 하고 이미 하늘나라로 간 회원도 있다. 조금 늦게 합류한 남성 회원 한 명은 비밀도 많고 수업 중에 젊은 사람 중심으로 내용이 흘러가면 이내 한문을 쓴다. 나는 궁금해 화장실에 가는 척하면서 뒤에서 곁눈질을 하다가 노트를 휘익 뒤집어 본 적도 있다. 잊지 않으려고 한학을 수시로 복습하는 거였다. 그날부터 나는 의도적으로 그 회원의 능력을 개발하기로 했다. 
“도와 주세요. 제가 너무나 바빠서 이 교실 교재 준비를 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논어 한 장씩 해제를 해 와서 저를 주면 제가 수업을 할게요.”
이를 계기로 그 회원은 일주일 동안 교재 만드는 일로 시간을 채우게 되고 몇 년이 지나자 책 한 권 분량이 넘게 됐다. 나는 다시 종용했다. 논어 저자가 되라고 졸랐다. 누군가가 자꾸 부추기고 힘을 실어주면 무엇인가 태어난다. 
드디어 그는 논어 저자가 됐고 스마트폰을 개비해 점진적으로 세상과 소통 범위가 넓어졌다. 지난해에는 교보문고에서 강의를 요청해 오기도 했으나 말이 어눌해 거절하고 말았다.   
그 회원의 아버지 견해로는, 세뱃돈은 아랫사람들에게 내려주는 용돈 정도로 알고 있기에 자신의 자식들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연유건 남들이 다 받고 설렌 세뱃돈 경험이 없다기에 나는 소급해 정성스럽게 담은 세뱃돈을 줬다. 그 아련한 행복감을 그 회원이 누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그 기분을 알게 해주고 싶었다. 그날 나도 행복했고 그도 행복했다. 
그리고 수년이 흘렀는데 오늘 실크머플러가 돼 내 목을 감싼다. 겨울이 춥지 않다. 마음이 키운 순수나무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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