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해비타트 연수단의 대한주택관리사협회 방문. 지난달 23일 인도, 필리핀 등 9개국에서 온 학자, 공무원, 활동가 등 도시개발 전문가들이 국제연수 일정의 하나로 대주관과 한국주택관리연구원, 대림산업 등을 견학했다.
이 자리에서 대주관은 한국 공동주택관리의 핵심축으로 ‘주택관리사제도’와 ‘장기수선제도’를 소개했다.
‘주택관리사제도’는 공동주택에 특화된 인재를 양성해 전문관리를 맡기는 시스템, ‘장기수선제도’는 건물과 여러 설비의 생애주기를 계산해 시기별 대수선과 교체공사를 진행하도록 규정한 시스템으로 한국적 공동주택 관리의 대표적 체계다.
고층건물과 건축기법은 근현대과학과 구미문명이 빚어낸 서구의 산물이지만, 이를 들여와 국민적 주거시설로 정착시킨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것도 유럽에선 거의 실패한 모델을 우리 문화에 맞도록 개량해서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개발도상국들이 배워갈 만하다.
첨단 편의시설과 온돌시스템을 갖춘 한국식 아파트의 건설기법,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생활적·재산적 가치를 유지해 주는 관리시스템의 수출은 K-pop 못지않은 ‘K-housing’으로 한류의 새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아파트 역사는 길게 잡아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인류사로 보면 아파트처럼 한 건물에 수직적으로 모여 사는 시대는 아직 찰나에 불과하다. 관리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건 그보다도 짧다. 건설 노하우는 어느 경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지만, 관리제도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그래서 고치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꽤 많다.
특히 장기수선제도는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취지는 훌륭하지만 모든 규정대로 집행하기엔 현실적 여건이 따라주질 못하는 것이다.
아껴 쓰고 관리도 잘해서 아직 멀쩡한 시설을 시한이 도래했다는 이유만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여 교체해야 하느냐, 수선계획을 조정하기 위해 멀리 떨어져 사는 집주인의 동의서를 받아야만 하느냐는 등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당장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데 모아둔 돈이 없는 경우가 가장 큰 난관이다.
서울 모 아파트가 승강기 교체공사를 늦게 했다는 이유 등으로 1,400만원의 과태료 폭탄을 맞게 생겼다. <관련 기사 1면>
이 아파트는 2013년으로 예정돼 있던 승강기 교체를 2015년에 완료했고, 2016년에 하기로 돼 있던 배관교체공사는 2017년이 돼서야 (그것도 일부만) 진행하려다가 입주민 분란으로 인해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장기수선계획의 수립과 집행은 엄격하게 규정해 놓고, 이 돈을 얼마나 걷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입주민 자율에 맡겨놓다 보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현장 관리자들은 “입주민에게 장기수선제도의 의미와 중요성을 누차 설명해도 당장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어 하는 이기심 때문에 제대로 걷어 적립할 수가 없다”고 하소연한다.
“충당금이 모자란다고 하니 조금씩 더 걷자”는 선도적 목소리는 “당신 돈이 그렇게 많아?”라는 야유 한마디에 힘을 잃고 만다. 이 세계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계획 불이행을 벌하려면 충당금 과소적립도 함께 벌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오래전부터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는 모양새다.
정부가 목소리 큰 다수의 눈치만 살피면, 힘 없는 관리자들은 양쪽의 화살받이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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