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 고

전 기 택 관리사무소장
서울 강남구 거평프리젠아파트

모든 것은 말 때문에 사달이 나는 것 같다. 감정을 누르지 못하면 말도 함부로 나오기 마련이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지만 몇 년 전 한창 입주민의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려 툭하면 경찰에 신고하던 때다. 
입주민들이 관리사무소에 몰려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끼리 언쟁이 생겼는데 출동한 경찰관이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대머리를 대머리라고 놀려도 모욕죄가 됩니다”라며 모자를 벗어 머리숱이 없음을 보여준다. 
법으로 하면 걸릴 비방을 여러 사람 앞에서 한 것이다. 모욕죄건 명예훼손죄건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서 공공연하게 상대방을 비난하면 전파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죄가 성립된다고 한다. 그 당시 신임회장을 인정 하지 않고 전 회장이 다시 복귀하기 위해 세력을 모아 관리사무소를 점거하고 직원 자리도 용역직원과 입주민들이 독차지해 빼앗을 기세였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모양이 돼 관리사무소 앞에 매트리스를 깔고 농성하면서 출근도 막고 출입문 열쇠도 바꾸는 수모도 당했다. 아파트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보는지 조사관들이 조사를 미루자 지친 입주민들이 서로 간의 고소 사건을 취하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 후 한 번은 모욕죄로 고소 당한 입주민이 관리사무소에 앉아 있는 동대표에게 이것저것 따지면서 화를 북돋우자 동대표가 혼잣말로 “애비 에미도 없냐? 에이, 위아래도 없는 이런”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녹음해 맞고소 한 일이 있었다. 녹취록에는 “위아래도 없는 X”으로 표시해 50만원 벌금형을 받았지만 그 동대표는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그 욕했다는 부분이 욕이 아니라 ‘이런’이었다는 녹취록과 음성 파일을 제출했다. 재판장에서 공개적으로 들어 본 결과 ‘이런’이 맞아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말은 다소 무례하지만 나이 차이도 있고 인격적인 평가를 저하시킬 만한 모욕적인 언사에 해당할 수 없다는 판결이었다. 한편으로는 명백한 욕이 아니면 모욕죄로 고소해도 처분결과는 ‘증거불충분’이 된다. 
예를 들어 “xxx” 라고 누가 욕한 것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다”고 증언하면 구체적인 욕을 표현 못해 증거 능력이 없다고 한다. 입주민들 사이의 사소한 업무방해 등을 법으로 해결하다 보면 상대방도 같이 고소하는 법이다. 동대표로서 입주민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말을 줄일 것인가 아니면 아파트 운영을 방해하는 것을 적시해 문제 삼을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었는데 후자를 택한 것 같다. 
그때 하도 그런 일이 잦으니까 동대표 회장이 나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보더니 아예 염색을 하지 말란다. 말 그대로 흰머리만큼 연배란 것을 강조하고 동시에 측은지심이 우러나게 해서 분위기를 진정시키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 말에 따라 흰머리로 다니니 염색하는 번거로움도 없어지고 덤으로 속 알 머리도 난다고 주위에서 말하니 일거양득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이를 덜 의식해서 염색을 안 하는 것이지 나이 듦을 인식할수록 까만 머리로 염색을 해야 예의일 것 같다. 
이곳 아파트는 면적이 작다 보니 좀 더 큰 면적을 찾아서 이사하는 경향도 있고 어느덧 세월도 흘러서 그때의 입주민들은 거의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상대방은 나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다 내가 있으므로 생긴 것이다. 말로써 일을 만들기 전에 말을 아껴서 평온을 유지함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내가 말하는 것을 한 템포 늦추고 상대방의 말을 경청만 해줘도 민원은 반 이상 해결된다고 한다. 어떤 경우 일의 원인이 내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상대방일 수도 있겠지만 불편한 일을 겪고서 평상심으로 돌아온 지금은 더없이 고맙고 보람 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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