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산 맹씨 행단 - 600년 전 맹사성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의 가을 빛

나무를 보면 역사가 보이고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다’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노랫말처럼, 날이 저물도록 발길을 붙잡는 가을 여행은 우연한 시간여행이었을까.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걸 보네” 
윤도현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화창한 오후 나뭇잎 채색 같은 길을 따라 떠난다.  
 

▲ 최영 장군이 물려준 맹씨 고택 - 고려 말·조선 초 민건축양식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간 살림집으로 사적 109호로 지정됐다.

#맹씨 행단

그날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었다. 아산 시내의 온천동과 좌부동을 지나 배방면 중리마을 골목길로 들어가면 큰 나무들과 잘 어울리는 작은 고택이 나온다. 한 뼘 정도 햇살이 남은 오후라 문화해설사도 자리를 비우고 고택에는 서너 명만이 은행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년 봄 개국한다는 모 방송국의 촬영진들이다. 오래 전 기자생활을 버리고 나무가 좋아 나무를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던 한 남자를 그곳에서 만났다. 소나무 같은 필체의 명함 한 장을 얻는다. 
“나라의 주요 관리가 바뀔 때마다 우리는 맹사성을 떠올리곤 합니다. 청백리 명재상의 상징인 맹사성의 삶을 그리워하기 때문이겠지요. 시속(時俗)의 흐름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던 그의 큰 정치, 큰 삶의 본보기 혹은 상징으로 살아남은 은행나무 한 쌍은 그래서 이 계절에 더 간절히 바라보게 됩니다.”

‘맹사성 고택의 은행나무-어진 사람의 향기에 취하다’는 기행문 형식의 글을 쓴 나무칼럼니스트 고규홍 교수를 우연히 만난 것은 여행의 의미가 배가 되며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다. 
기와지붕 위로 은행나무 잎이 떨어진다. 고택에 단을 만들고 은행나무를 심어 사람들은 그곳을 ‘맹씨 행단’이라 불렀다. ‘행단(杏壇)’은 중국의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에서 유래해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들이 학문을 닦는 곳’으로 해석한다. 
이 집은 원래 최영 장군의 집이었다. 최영 장군은 이웃에 살던 맹사성의 부친 맹희도를 손주사위로 삼으면서 이 집은 대대로 맹씨 가문의 집이 됐다. 
고택은 가운데 대청 두 칸과 양쪽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간 살림집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문화재로 사적 109호로 지정됐다. 
고택의 뒤편에는 정자가 있다. 맹사성 생전에 명재상이었던 황희, 권진 등과 함께 제가끔 3그루씩, 모두 9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해 구괴정으로 불린다. 
맹사성은 황희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대표적으로 꼽히는 정치인으로 예악에 밝고 어진 인품으로 최고의 재상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태조 이성계와 세종에 이르러 우의정·좌의정을 지내며 1435년(세종 17년) 76세의 고령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 온양에서 노후를 보낸다. 
청백리답게 그의 말년은 소박했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며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바깥 출입은 언제나 소를 타거나 걸어 다녔다. 식량은 조정에서 지급하는 녹미(祿米)로 만족했으니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정승 출신이 아니라 평범한 노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6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매년 가을이 돼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면 맹사성의 소박했던 청백리의 이야기는 행단 밖으로 퍼져 나갔다. 
행단의 두 그루 은행나무를 사람들은 쌍행수(雙杏樹)라고 불렀다. 두 그루 모두 비록 은행나무의 중앙은 썩어 제 모습은 아니지만 주변의 맹아지가 다시 자라서 200~300년이나 되니 마치 한 그루의 거목(巨木)처럼 기품을 잃지 않았다. 
고택의 허름한 살림집에는 맹사성의 후손인 노부부가 산다. 나이가 들어 귀가 어두운 후손은 빗자루로 은행잎을 쓸고 있다. 내년 봄이나 돼 방송이 방영된다는 말에 “내년까지 살지 모르겠어”라며 웃는데 은행알처럼 구르는 목소리는 아직 정정하다.  

▲ 아산 곡교천의 은행나무 길 - 50년 된 은행나무 350그루가 가을을 물들이다.

아산에는 곡교천이 있다. 광덕면에서 발원해 온양동에서 온양천과 만나 곡교천을 이루고 아산만 삽교천으로 빠지는 강이다. 아산 시내의 충무교에서 현충사에 이르기까지 2㎞에 걸쳐 50년이나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은 가을이면 곡교천 주변에 노란 터널을 만든다. 
아산시가 현충사의 성역화 길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도 맹씨 행단과 무관치 않으리라. 이맘때면 예전의 온양 온천의 명성과 함께 수도권 여행지로 은행나무가 제대로 한 몫을 한다. 천변에 하얗게 반짝이는 억새와 은행나무 길이 어우러져 많은 사람들이 깊어가는 가을을 따라간다. 

▲ 120년 전 본당 건립을 위해 약 3m 옮겨진 느티나무

#날이 저물도록 몰랐다

아산만을 따라 아산호 인근의 공세리 마을로 들어선다. 공세리는 예전에 공세창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공세창(貢稅倉)은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곡(稅穀)을 수납해 한성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지금의 공세리 성당은 공세창 일부 부지로 본당이 있는 자리는 옛날 ‘침해당’이라는 제당이 있어 배들의 무사항해와 풍년을 기원했던 곳이다. 베네딕토관과 본당 사이에 있는 약 380년 된 느티나무는 그때 성황당 나무로 1894년 공세리성당의 설립 이후 본당 건립을 위해 120년 전에 약 3m 옮겨 지금의 자리에 심어졌다. 
공세리성당은 300년 이상의 팽나무, 느티나무 등 보호수 일곱 그루에 둘러싸인 고딕양식의 예쁜 성당으로 엽서에서나 보는 그림 같다. 팽나무와 느티나무는 가을빛이 완연하고 은행나무 한 그루도 성당의 뾰족지붕을 가지를 늘어뜨려 커튼을 친다. 옛 포구는 사라졌지만 논과 밭이 된 들판의 성당 언덕은 붉게 지는 일몰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리며 그때야 섬이 된다. 별이 뜨고 멀리 아산만 방조제에 불빛이 가득하다.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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