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자로 가는 길 위의 여행

이성영l승인2018.10.24 13:36:48l10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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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시암 가는길은 솔바람이 물소리를 낮춘다.

단풍 구경은 백두대간을 따라 산행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운치 있는 산사를 찾아 호젓한 산길에 들어서도 그만이다. 
굽이굽이 돌아치는 계곡을 따라 물빛 고운 가을 길에 만나는 들꽃들이며 나무의 열매들. 
그 사이로 물들어 버린 숲길에 들면 내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움직임은 솔바람의 감촉에도 세포가 열리고 온 몸이 깨어나며 바람이 된다. 


 

설악의 정기는 대청·중청·소청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러 잠시 머문다. 
봉정암은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1,244m에 있는 암자다. 봉정암은 설악산의 정수리에 봉황이 들고,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바위봉우리가 연이어 성처럼 길게 둘러쳐 있는 용아장성을 병풍 삼아 자리를 잡았다. 용아장성을 중심으로 옥빛의 물은 너럭바위를 흐르다 폭포를 만들며 좌측으로는 구곡담계곡과 우측으로는 가야동계곡이 오세암 하부를 지나 수렴동계곡으로 만나니 영시암과 백담사를 거쳐 백담계곡을 이룬다. 

▲ 오세암 가는 길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 오세암은 가을이 익어가며 기암의 용아장성은 햇빛에 반사돼 푸른빛이다.

#오세암 가는 길

용대리에서 마을버스로 백담계곡을 15분 정도 오르면 백담사에 이른다. 백담사는 647년 신라의 자장(慈藏)이 설악산 한계리에 창건하고 한계사(寒溪寺)라 했다. 그 후 다섯 번의 화재로 사찰은 소실되고 만다. 지금의 절터는 그곳에서 20리 상류에 다시 중창됐으니 대청봉에서 한계리까지 웅덩이가 100개였기에 이름에 담(潭)자를 넣어 현재의 백담사가 됐다. 
물과 불이 조화로운 음양이치다. 그러나 이 절은 1919년과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됐으며, 1957년에 재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세간의 이목은 전 대통령의 귀향길로 더 알려지며 근대의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등을 집필한 만해사상의 고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 수렴동계곡의 돌탑들은 산사를 밝히며 백담사의 상징이 됐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백담사를 찾으며 수렴동계곡 냇가의 하얀 돌덩이들은 탐방객들의 염원을 기원하는 돌탑으로 바뀐다. 때론 계곡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무너졌을 만한데 돌탑은 해마다 더해만 간다. 작은 돌탑들은 산중에서 하얗게 불을 밝히며 이제는 백담사를 상징한다. 산소바람이 이는 아름드리 전나무와 금강송 푸른 그늘을 따라 영시암으로 가는 길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솔바람이 물소리를 낮추고, 단풍이 옥빛 물가에 손짓하며 발길을 머물게 한다. 간혹 참빗살나무의 앙증맞은 붉은 열매는 작은 복주머니같이 지나가는 길손의 눈높이에서 살랑인다. 
단풍 사이로 보이는 옥빛 물살에 취하니 사진 찍기도 바쁘다. 설악의 안개와 비가 나뭇잎을 스치며 깊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돌 틈 사이 바위를 흘러 옥빛의 담을 만들고,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가슴 깊이 폐포까지 씻어주며 머리는 상쾌하고 맑아진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흡이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어 머물렀으며, 후에 수렴동계곡에 다시 지은 영시암(永矢庵)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해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이었을까. 

청아하게 물든 단풍그늘에서 
바라보는 그대의 고운 시선은 
이미 가을 숲이 돼 버린다


서인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부친 김수항(金壽恒)과 김창흡의 형제들도 좌의정에 올랐으나 김창흡은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어 자연에 묻혀 산다. 영시암은 그가 직접 지은 거처였으며, 그곳에 머물며 설악산을 자주 올랐다. 김창흡의 유봉정기(遊鳳頂記)에 따르면 단풍이 절정에 이른 10월 초에 영시암에서 오세암-봉정암-쌍폭-구곡담을 거쳐 다시 영시암으로 돌아온 것으로 기록돼 있으니 “구름이 양쪽 벼랑 사이에서 나와 유유히 흘러가고, 옥 같은 가파른 산과 비단 같은 나무들이 빛을 낸다”고 했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엄중하게 우거진 속에 작은 시내가 폭포를 이뤄 자주 그 옆에서 쉬었다. 북쪽으로 여러 봉우리들을 바라보니 하얀 것이 마치 빙호동에 쌓인 옥처럼 밝게 빛나 시선을 빼앗았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 길에는 전나무와 소나무가 많다. 근래에는 전 백담사 주지였던 도윤 스님이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의 도움으로 영시암을 중창했다. 지나가던 산객들과 봉정암·오세암으로 가는 길손들의 중간 휴식처로서의 역할이 노 스님의 뜻이었을 터. 절에서 내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에 피로가 가시며 고마움도 느껴본다. 
영시암은 2018년 5월에 도윤 스님의 입적으로 백담사의 말사가 됐다. 평탄한 길은 영시암에서부터 서서히 산세를 그린다. 영시암을 지나 오세암가는 길은 좁은 계곡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소롯길이다. 계곡에는 서너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어 그 아래에만 서 있어도 경이롭다. 
간간이 수백 년 된 전나무가 바람에 쓰러져 썩어가는 흔적들은 숲을 울창하게 하는 일상들로 자연의 숲을 만끽해 본다. 숨가쁘게 오르막길을 걷는 중에도 계곡을 감도는 물소리와 거침없이 흐르다 떨어지는 먼 폭포의 소리가 내 몸을 깨운다. 가끔 마주치는 멧돼지나 오세암 가까이 만경대 오르는 안부에서 쪼르르 달려오는 다람쥐는 지나가는 사람도 개의치 않고 제 할 일만 할 뿐 그저 신기하다. 
만경대에 오르면 오세암이 발 아래 보이고 가야동계곡과 용아장성의 기이한 암릉이 눈앞이다. 
오세암은 공룡능선의 시작점인 마등령을 뒤로하고 탑사와 종각 사이로 용아장성은 기암들이 햇빛에 반사돼 푸른빛이다. 지금이야 길이 좋아졌지만 오세암은 설악의 첩첩산중에 자리한 관음도량으로 1455년 김시습(金時習)이 백담사의 부속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고, 1643년 설정(雪淨)이 다시 이 절을 중건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와 키웠는데, 조카가 다섯 살 되는 해 어느 날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장을 보기 위해 절을 잠시 떠난다. 그러나 폭설이 내려 이듬해 봄에나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으니 그 아이가 다섯 살로 그 후로는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불렀다. 
오세암은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선사가 수도했으며, 근대에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님의 침묵’을 새벽 여명 속에서 탈고한 곳이기도 하다. 오세암 화장실 앞을 지나 계곡으로 내려가 올라서면 마등령과 봉정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봉정암으로 가는 가야동계곡은 용아장성을 좌우로 구곡담계곡과 함께 내설악을 대표하는 계곡이다. 
이맘때면 봉정암은 단풍객들로 시끌벅적하다. 단풍이 내려오는 산사의 고요는 그 소리 또한 묻어두니 늘상 깨어 있는 설악의 정기는 하늘로 열리고 땅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가을이 깊어진다.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이성영  kslee@hap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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