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시집이 내게로 왔다. 박선영의 ‘이런 날은’이다. 나는 책을 열지 않고 같은 제목, 다른 글쓰기를 해본다.  
오늘을 ‘이런 날’로 설정한다면, 가뭇없이 외로운 토요일이다. 하루 전날, 고요하던 내면이 잠시 흔들렸다.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내적 풍경 앞에서 나의 처방은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풍경 바꿔 넣기를 하는 것이다.  
터키 남자 3인의 한국 여행기를 본다. 지식층의 개념 있는 여행이다. 시인은 자기 나라보다 앞서 간 출판 문화의 현장을 찾아 파주를 선택했고, IT업종의 대표는 업종대표 전시장을 찾았고, 의사는 대장금을 통해 식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궁중음식을 먹어보기로 작정하고 왔다. 아울러 부산의 6·25 참전용사기념공원에 가서 터키군의 영령들에게 참배의 예를 갖춘다. 관광을 왔지만 결혼한 친구 집에 갈 때도 예절에 맞는 의관을 갖추더니 이곳에도 흑백 톤의 정장을 갖춰 입는다. 편리함보다 예를 우선하는 민족 같아서 본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대충 구경하듯 하는 게 아니라 영혼을 달래주고 마음을 담아 기도를 한다. 영상관에서 기록물을 보는 동안 세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감동이다. 타국의 문화에 대해 진지하고 속 깊게 관심을 가진다는 게 진정한 여행이 아닌가. 그들은 잘 가꿔 놓은 추모공원을 통해 우리네 정신을 엿보고 있다. 그 용사들을 터키가 낳았어도 지금 이 땅에 묻혔으니 우리나라 사람이며 자기네와 우리가 형제라고 말한다.  
성서가 제시하는 산상수훈의 진복팔단 마지막 8단계 세계가 거기에 있다. 그들이 아름다워 보인 것은 귀찮고 힘들어도 의관을 갖추면서 예의를 드러낸다는 데 있다. 아무리 본질이 중요하고 내용이 알차다고 해도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전달이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갖추기 어렵고 힘들어도 지킬 때 아름답다는 것을 자각하며 나는 가만히  텔레비전을 끈다. 
터어키의 젊은이들이 죽은 사람에게도 예를 갖춰 주는데 산 사람의 어느 특정한 날, 의관을 갖추지 않고 행사에 임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못내 서운했다. 가을에는 출판 기념회나 전시회, 음악회 등 행사가 많다. 그 날이 오기까지 땀과 노력을 양으로 보여줄 수 없지만 세상에 작품으로 드러내는 일이라 설렘도 수반된다. 그럴 때 하객들은 조금 성의를 보이는 게 예의다.    
40년 전 수필을 지도하던 임선희 선생님은 아무리 불편하고 힘들어도 행사에 참여할 때는 정성 들여 의관을 갖추고 와서 행사장을 환하게 빛내줬다. 나도 이 다음에 그런 입장이 되면 꼭 그렇게 정성스러운 모습으로 후배들을 맞으리라고 마음을 먹었던 터라 은연중에 마음에 두게 된다.   
그러나 고령의 나이 탓이거나 개인과 달리 직업특성상 간간이 일어나는 일상사라고 치면 감각이 둔해질 수도 있겠다. 허나, 축하받을 사람은 정장을 하고 마음을 썼는데 축사를 하는 사람이 점퍼차림이라면 걸맞지 않는다. 무릎이 나온 바지를 입고 신년 하례를 하고, 오리털 점퍼를 입고 수상 무대에 오르는 것도 한 번쯤은 생각을 해볼 일이다.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느낌이 들도록 돕는 것이 축하다. 큰 변화를 보여주지 못할 때는 “나 자기 축하하러 온다고 드라이하고 왔다” 같은 말도 감사하게 듣는다. 멀리서 온 이는 거리로 감사하고 정성이 깃든 축사는 잊히지 않는다.  
공자님도 의관에 대해 강조하고 있지만 만사에 둔감해지는 91세 내 어머니의 의관 철학도 연륜이 주는 지혜라서 귀담아 듣는 편이다.  
“그 한번이 이미지의 전부가 될 수도 있다. 가능하면  분위기에 맞게 차림새를 갖추고 용모를 단정히 하고 다녀라.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우고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화장하는 것도 잊지 말아라. 성의 없어 보이면 무엇을 주고도 욕먹는다.” 
말본새 없이 해서 두꺼운 축하 봉투를 얇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누가 봐도 특별한 날이라 조금 마음을 썼다는 느낌이 들 때 감사하고 고맙다. 시골 어른들이 유행에 뒤진 한복이나 양복을 입고 와도 차려입은 정성에 감동한다.
정성보다 편함을 택할 때는 이미 늙음이 쳐들어 왔을 때다. 달라지고, 망가지고, 생략하는 것을 일상화할 때는 세대 간의 문화 차이 때문에 서로 감정이 어긋나기도 한다. 내 동생들도 나에게서 이미 맛봤을 것이나 내가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되짚어 보면서 문제 삼고 서운했던 감정을 하루 만에 버리고 그 자리에 베토벤과 슈베르트 곡을 담았다. 때로는 운동이, 때로는 예술이, 때로는 맛있는 밥 한 그릇이 망가진 감성을 회복하는 데 힘이 돼준다. 어지간하면 내 감성에 걸려들지 못하게 한 눈만 뜨고 사는 것을 넘어 이제는 반 눈만 뜨고 살아야 할 것 같다. 부처님의 실눈만큼만 뜨고 살면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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