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눈이 부시게 새하얀 햇살 좋은 날! 쓸쓸하게 야윈 그대 얼굴 보던 빗소리 나던 날! 
달빛 가득 풀벌레 우는 하얀 오솔길! 그때 석양에 황금빛처럼 빛나던 억새꽃! 

 

▲ 석양에 붉게 빛나는 창녕 화왕산의 억새밭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갔다. 백로가 지나니 아침으로는 이슬 맺힌 풀잎이 서늘한 바람에 철이 지나감을 안다. 바람이 산줄기를 따라 지나가며 나뭇잎들을 흔들고 푸르고 높은 하늘에는 흰 구름이 선명하다. 단풍이 들 것 같은 계절이다. 이제 다가올 차가운 이슬은 마지막 가을꽃을 씨앗으로 만들고, 낮의 햇살은 따가운 햇볕으로 담금질한다. 

가을여행은 억새의 빛깔로 시작된다. 억새의 싱싱하고 까칠한 푸른 잎들 위로 낱꽃망울의 선홍빛 부채살이 가을바람에 씨앗들을 보낸 후 이삭들은 새하얀 꽃처럼 다시 핀다. 억새꽃은 햇빛과 바람에 시시각각 다채로운 빛을 낸다. 그 빛깔은 입가와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사라지던 솜사탕의 부피와 같이 햇살 사이로 부서지다 실바람의 흔들림에 반짝인다. 처음으로 맛보던 솜사탕의 달콤한 기억들과 유년의 산 넘어 문수할머니네 화전 밭 가던 오솔길 옆 말라버린 옥수수대 사이에서 무리지어 피던 기억 속의 풍경들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그런 풍경들은 때론 역동적인 산행과 교차하며 행복한 호르몬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억새꽃들의 하얀 보풀이 바람과 빛을 만나 마음마저 흔들어 버리는 가을의 시작, 그런 풍경들을 만나러 길을 떠나본다.

▲ 손에 잡힐 듯 기암고봉들이 연이어 억새와 어우러진 신불산 능선(영남알프스)
▲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 간월재(900m)의 억새평원(영남알프스)

영남 알프스

밀양시, 양산시 그리고 울산시 울주군을 주변에 두고 석남터널을 중심으로 가지산(1,240m), 운문산, 천황산, 능동산과 신불산, 영축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맥을 이루고 있어 유럽의 알프스를 닮았다. 가을이면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 간월재의 10만평 규모의 억새 군락은 새하얀 평원을 만든다. 억새는 신불산의 능선으로 계속 이어지며 가을빛에 눈부시다.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가는 완만한 능선은 기암들과 억새의 오솔길에 손에 잡힐 듯 고봉들이 하늘에 맞닿아 이국적인 풍경을 만드니 가히 영남의 알프스다. 

오래 걷는 것이 자신 없으면 손쉽게 영남 알프스 얼음골 케이블카를 이용해 해발 1,020m 지점까지 올라 영남 알프스를 조망해 보고 천황산(1,089m), 제약산(1,108m) 아래 사자평고원을 관망하는 것도 좋다. 영남 알프스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재약산 남동쪽 사면 해발 750m 부근에 형성된 사자평고원습지는 산들늪으로도 불린다. 이곳에는 매, 삵, 하늘다람쥐 같은 멸종 위기 동물을 비롯해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 한때 억새평원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환경부가 이곳을 보전 가치 높은 생태계로 인정해 습지 보호지역으로 지정했다. 산행 후 밀양, 울산, 양산의 통도사 등 어느 방향으로 잡아도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산림청은 9월 추천 국유림 명품숲으로 신불산 억새숲을 선정했다.

 

경남 창녕 화왕산

군립공원인 화왕산은 오래전 화산이 폭발해 형성된 산이다. 람사르협약 보호 늪지인 우포늪과 함께 창녕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봄이면 산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 만발한 진달래와 가을에는 분화구 주변의 평원에 하얗게 나풀대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한때는 정월 대보름 억새 태우기 행사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다가 2009년 억새태우기 행사에서의 참변으로 적극적인 행사로 이어지지 않고 있지만 가을 화왕산의 억새 물결은 전국에서 손꼽을 풍경이다. 화왕산은 마치 분화구에서 억새꽃들이 햇살을 받아 팝콘이 튀는 듯, 분화구 주변을 에워싼 억새들의 풍경은 능선의 기암들과 화왕산성의 배경이 어우러져 가을빛에 더욱 고즈넉하다. 그곳에 서면 과거로 돌아가 관룡산 기암들의 능선을 지나 부드럽게 에워싼 화왕산의 억새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만날 것 같다. 

 

전남 장흥 천관산

천관산(723m)은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능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손꼽힌다. 높지는 않지만 정상 부근의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해서 천관산이라 이름 붙였다. 
기암괴석과 봉우리마다 봄에는 동백꽃, 가을에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일반적인 천관산 산행 코스는 장천재를 기점으로 선인봉-종봉-구정봉-환희대-억새능선-연대봉-봉황봉 능선을 거쳐 다시 장천재로 내려서는 코스다. 4시간 정도 소요된다. 정상에 오르면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40만평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억새 능선의 중간인 환희대는 해적이 되려는 산적들이 넋을 잃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던 영화 ‘해적’을 찍은 장소기도 하다. 환희대에 올라 어떤 꿈을 생각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면 제대로 풍경에 취했을 터다. 장흥은 먹거리도 풍성하다. 키조개 역시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싱싱한 맛이다. 장흥읍 정남진 토요시장에는 한우삼합을 판매하는 시장이 열리니 주말을 이용해 들르면 더욱 풍성한 가을여행이 되지 않을까.

충남 홍성 오서산

오서산(790m)은 첫손에 꼽는 가을 여행지다. 교통편이 가까운 중심부에 있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바다가 보이는 가을 오서산의 억새꽃은 물론이고 먹거리 또한 풍부하기 때문이다. 오서산은 서해바다와 가까운 산 가운데 높은 편이다. 보령시와 홍성군의 경계가 되니 등산로도 여럿이다. 보령시 성연주차장이나 오서산 자연휴양림, 홍성군 상담주차장 등에서 출발한다. 여행은 먹거리도 한몫 한다. 오서산의 억새꽃을 즐긴 후 오천항, 대천항, 무창포 등은 제철 해산물이 입맛을 돋운다. 오서산 서쪽 20㎞ 거리에 오천항이 있다. 사리 때가 되면 바닷물이 넘쳐 동네가 물 위에 떠있는 기이한 현상도 본다. 오천항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키조개 산지다. 9월은 싱싱한 키조개를 맛볼 수 있는 시기다. 오천항수산물판매센터에서 키조개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 회, 샤부샤부, 무침 등 다양한 요리가 나온다. 외연도, 삽시도, 녹도 등 섬으로 갈 수 있는 대천항도 인근에 있어 여유로운 가을여행을 만들 수 있다. 

▲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사라지던 솜사탕의 부피와 같이 햇살 사이로 부서지는 억새밭

경기 포천 명성산

포천에는 국망봉, 강씨봉 등 궁예의 전설이 지명으로 남은 곳이 많다. 울음산도 그 예다. 궁예가 나라를 잃고 쫒기다 그 산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해 울음산으로 불렸다. 울음산은 한자로 옮기면 울명(鳴), 소리성(聲), 뫼산(山)(922m)이다. 명성산은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완만히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때로는 김화 방면이나 용해에서 오르는 각흘산(838m)과 명성산을 연계한 코스나 명성산 정상에서 좌측 길을 따라가면 암릉 지역인 궁예봉을 지나 철원방향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명성산 산행의 진면목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쉽지만은 않다. 김일성의 별장 터였던 산정호수 주변과 이동갈비, 막걸리 등 먹거리와 일동의 유황온천으로 어우러진 가을 수도권의 산행으로 제 이름값을 한다. 배추와 무, 옥수수를 심었던 화전민터에 새하얗게 피어나는 억새꽃은 과거의 힘들었던 향수마저 잊게 만들어 계곡의 단풍과 어우러진 행복한 억새산행의 시작이 된다. 억새꽃이 그렇게 하얀 것도 기억들이 햇살에 부서져 망각하는 까닭이다.
억새는 적당한 바람과 햇빛이 만들어 내는 가을빛을 쫓아가는 힐링의 여행이다. 물론 걷는 행복도 포함한다. 억새는 제주의 오름이나 강원도 민둥산, 서울의 하늘공원에서도 먼저 가을을 알리고 단풍이 들 무렵 절정을 이루니 억새꽃의 망울이 터져 흔들리면 가을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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