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류 종 인 관리사무소장
충남 당진 대덕마을5단지아파트

필리핀의 한 마을에선 암벽에 철심을 박아 관을 올려놓는 장례법이 있다. 고인은 두 다리를 뻗고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긴다. 이까짓 두려움쯤이야 살아 있을 당시 이미 겪어낸 일이므로 무서워 떠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암벽을 오르던 바람이 관 뚜껑을 발로 차거나 철심을 휘어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저 웃는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을 나와 나름의 직업을 평생 붙들고 산다. 내가 선택한 직업보다도 어찌어찌 하다 보니 예기치 않은 직업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더 많지 싶다. 어떤 직업이든지 월급을 받는 직업은 육십을 전후해 밀려나게 된다. 
이는 필리핀에서 허공의 난간에 몸을 맡기는 일과 같이 저 세상으로의 초대나 다름 없다. 
어떤 이는 실컷 놀기나 한다면서 이곳저곳을 배회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싫증이 난다.
연금이 나와 호기로운 사람도 마땅히 할 일이 없어 빈둥빈둥하는 생활이  반복되면 희망이 있을 수 없다. 소득이 부족해 일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은 현직에 있을 때 대우받던 걸 생각하면 한심한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사회의 냉대 속에 일거수일투족이 불안하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도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추스르고 병원 문을 전전하다 보면 기다려 주지 않는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직장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고 싶어도 시간을 핑계로 응해주지 않는다. 괜한 부담을 갖지 않겠다는 심산이겠다. 다녔던 직장에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후배들이 반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친구끼리 삼삼오오 어울려 밥이나 먹는 게 소일거리의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은 그래도 다행이다. 여윳돈이 없거나, 있어도 벌벌 떨고 쓸 줄 모르면 그마저도 언감생심이다.
마누라 곁을 떠날 수 없으니 마누라가 죽을상이다. 오죽하면 ‘일식이, 이식이, 삼식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58세에 명예퇴직할 때는 몰랐다. 퇴직금으로 집세라도 받을 대책을 세웠어야 하는 건데 이를 소홀히 하다 보니 퇴직금은 온데간데없고 믿을 수 있는 소득이라고는 국민연금이 전부였다. 1988년에 도입된 제도였으니 20년밖에 넣지 않은 연금이 넉넉할 리 없다.          제도 시행 첫해에 따놨던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꺼내 들고 주택관리회사를 찾았지만 젊은 사람들을 제쳐 놓고 나이든 사람을 반길 일이 없는 현실 앞에 또 다시 좌절을 맛봐야 했다.
주택관리사 동기가 운영하는 회사의 도움으로 일자리를 얻어 근무를 시작한 지 5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아파트는 임대아파트지만 인건비를 임차인이 부담한다. 급여를 누가 주는데 관리를 그렇게 하면 되냐며 ‘갑질’을 해 온다. 건물주가 ‘갑’이고 임차인이 ‘을’인데도 그 ‘을’은 직원들에게 ‘갑질’을 해댄다. 직원은 엄밀히 말해 회사의 발령으로 와서 일하는 것이고 임차인이 내는 월세는 관리회사에 내는 사용료가 맞다. 공무원은 정부가 선발하고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월급을 주지만 공무원 월급을 내가 준다면서 ‘갑질’하는 경우는 별로 못 본다. 원리는 그렇더라도 공무원이나 아파트에서 일하는 근로자에게도 신분이 보장되는 근로권이 있는 것이다. 상호 간에 인격적으로 대해줄 때 맡겨진 일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원리다.
전체 입주민 중 9할은 임대아파트에 들어와 살게 해준 당국에 고마움을 느끼며 직원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한다. 약 1할은 불만투성이다. 잘하는 일도 불만, 못하는 일도 불만으로 남을 탓하기 일쑤다. 그중에 3%는 구제불능으로 관리사무소 직원들을 괴롭힌다.
‘전부 다 바꿔야 한다’면서 근거 없는 말로 인격을 모독한다. 그래도 직원들에게 ‘어려운 사람 돕는다는 생각으로 무한 봉사하고 이를 직업의 윤리와 자긍심으로 삼으라’는 주문을 해보지만 직원들에게는 상처가 덧칠된다.
모아놓은 돈으로 놀면서 여생을 즐겨야 하는 나이. 인생 2막을 산다는 것이 녹록지 않다.
누구나 돈보다도 존경받는 노후를 꿈꾸게 마련인데 일 없이 세월을 보내는 건 오히려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부대끼며, 봉사하며, 돈 벌며 인생 2막을 살아보자.
서산에 지는 해가 아니라 서산을 물들이는 해가 돼 보자. 오늘도 고단한 일터를 뒤로하고 내일을 위한 쉼에 든다. 필리핀에서 허공에 맡겨지는 시체를 떠올리면 어떤 일이든 살아있음이 훨씬 낫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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