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대한민국은 언제부터인가 세계적인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이 세계 1, 2위를 다투고, 반도체와 스마트폰 등 IT분야에서 절대강자의 반열에 올랐다. 달리는 지하철에서도 와이파이가 시원하게 연결되고,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는 5G기술도 세계 최초로 상용화 된다.
한국은 주거부문에서도 지구상 최초의 실험을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파트다. 거주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계속 증가 추세에 있다. 그런 만큼 한국에서의 아파트 건축과 관리 형태는 아무도 가지 않은 최초의 길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아파트를 안락한 집으로 만들어주는 핵심장치가 주택관리사제도와 장기수선제도다.
주택관리사는 공동주택 관련 법률과 시설분야 전반에 대한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 일정규모 이상의 아파트를 관리하도록 해 부실관리를 막고, 장기수선은 건물과 전체 시설장비의 유지관리 및 교체주기를 규정해 장수명화를 유도한다. 외국에서처럼 아파트가 슬럼화하거나 빈민촌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핵심장치가 바로 이 두 제도다.
최근 들어 장기수선제도를 대폭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관련기사 1면>
장기수선계획은 경직성이, 장기수선충당금은 허술함이 주로 지적되고 있다.
얼마 전 한 아파트가 과태료 처분을 받았다. 전에 공사를 하거나, 장기수선계획을 조정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갔다가, 3년이 되기 전에 공사를 강행했다는 게 주된 이유다.
법 논리로만 따진다면 관할관청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수선계획을 조정할 당시엔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뒤늦게 긴급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이 발견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멀쩡하게 잘 운행하던 승강기가 갑작스럽게 멈추거나, 쌩쌩하게 물을 잘 뿜어 올려주던 부스터펌프가 하루아침에 고장을 일으키기도 한다. 승강기가 멈추면 입주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수십 층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부스터펌프가 돌지 않으면 입주민은 씻지도, 먹지도, 싸지도 못한다.
평소에 사용할 일이 거의 없는 소화장비들은 잘 정비해도 갑자기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법대로라면 조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선 이럴 때마다 장충금 집행을 위해 입주자, 즉 집주인 과반수의 서면동의를 받아 집행해야 한다. 물론 긴급사안일 경우엔 먼저 조치할 수도 있지만, 긴급의 명확한 정의조차 내리기 쉽지 않다.
장기수선계획서를 조정하고 장충금을 집행하는 건 ‘신의 영역’이란 말이 관리현장에 횡행하고 있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규칙에 나와 있는 73개 항목을 보면 ▲건축분야 ▲전기분야 ▲설비분야 ▲승강기분야 ▲소방분야 ▲통신분야 ▲지능형 홈네트워크분야 ▲상하수도분야 ▲토목분야 ▲환경분야 등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을 갖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 한 사람이 이 모든 분야를 꿰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단언컨대 지구상에 이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장충금의 적립과 사용 역시 문제는 매한가지다. ‘낼 땐 적게, 쓸 땐 많이’의 모순이 현재의 장충금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다.
장기수선제도의 불합리성으로 인해 관리현장이 큰 혼란에 빠져 있다. 애꿎은 범법자가 양산되기도 한다.
뜻이 아무리 숭고해도 현실에 부합하지 않으면 고쳐야 한다. 이젠 정말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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