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불행히도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외세에 의해 강제 이식됐다.
시민의 힘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계급사회를 철폐시킨 서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달리, 우린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아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정에 의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
일제의 침략은 우리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을 강제징용해 전쟁노예와 성노예로 착취했으며, 온갖 식량과 물자를 수탈해 간 것 외에도 우리 손으로 민주주의를 건설할 기회마저 앗아가 버렸다.
거기에 해방 이후 곧바로 분단과 전쟁이라는 민족 최대의 아픔을 겪은 것까지 생각하면 “무식하고 게으른 한민족이 일본 덕분에 개화됐다”는 친일파의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궤변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치욕적 언행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엔 “일어나라 조국의 자식들이여, 압제자의 피 묻은 깃발이, 사나운 적들의 고함소리가 우리 처자의 목을 따려 한다. 무기를 들어라, 적의 더러운 피로 논밭의 고랑을 적시자. 복수의 무기를 들어라. 모두가 너희와 싸울 것이다(중간생략)”처럼 전율을 느낄 정도의 살벌한 가사들로 가득하다.
프랑스혁명을 무력진압하기 위해 주변의 군주제 국가들이 쳐들어오자, 이에 항거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이 노래는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는지 절규하는 듯하다.
어렵게 얻어야 귀한 줄 아는 법인가. 남의 손에 의해 민주주의를 이식받은 우리는 아직도 이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우린 종종 큰 권력 앞에선 굴종하고, 작은 질서를 파괴하며 자유를 들먹인다. 민주주의의 기본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은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국민의 기본권은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 등으로 분류된다. 평등권은 ‘법 앞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유권은 ‘일정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 참정권은 ‘선거 등 국가운영에 참여할 권리’, 청구권은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구제를 요구할 권리’, 사회권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요구할 권리’를 뜻한다.
이 가운데 청구권은 특히 더 우리 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내 권리가 얼만큼인지 모르니 침해당한 내역도 알 수 없고, 게다가 국가에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허울만 민주국가였지, 실상은 압제치하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으니, 백성에게 국가는 그저 떠받들고 모셔야 하는 존재였다. 권리 없이 의무만 강요됐다.
그렇게 낡은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잠자고 있던 청구권을 살리기 위해, 현 정부 들어 ‘국민청원 및 제안’ 정책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청원을 올린 후, 30일 동안 20만명 이상 참여했을 때 정부가 답변을 내놓는 제도다.
지난해 8월 닻을 올린 이래 7개월여 만에 벌써 15만건이 넘는 청원이 올라왔으며, 지난달 30일 기준 17개가 공식답변을 받았다. 답변을 받은 것 중엔 ‘청소년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아파트 단지 교통사고 처벌’ 등이 있으며, ‘미세먼지 중국 항의’ ‘장자연 죽음의 진실’ ‘정부 개헌안 지지’ 등이 20만을 넘겨 답변대기 중이다.
최근 부천 모 아파트에서 일어난 여성 관리사무소장 폭행사건에 대한 국민청원이 진행 중이다.(관련기사 2면) 지난달 21일 첫 번째 청원이 올라간 이후, 8일간 5개의 청원이 더해졌다. 여러 언론매체에 보도된 만큼 관심도 뜨겁다. 다만 단일창구로 통합되지 않으면 참여인원 수가 분산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얼마나 많이 참여하느냐가 이번 청원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고 우리 근현대사만 봐도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명언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중세와의 작별을 고한 지 오래인 지금, 피플파워는 피가 아닌 단결로 보여줘야 한다.
이제 민주주의는 ‘참여’를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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