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두꺼운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혹한이 워낙 지독했기 때문일까. 봄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이 푸근하다.
예전엔 얼음이 풀리고 시냇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동장군의 위세를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에 마음 놓고 활기차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형 건축물이 삶의 터전이 되고, 첨단 기계·전자 장비들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면서 해빙기 안전사고 역시 자주 발생한다.
흙속 수분이 꽁꽁 얼었다가 녹으면 축대나 옹벽에 금이 가고, 토사가 흘러내리며, 심하면 붕괴에 이르기도 한다. 평지에선 지반침하가 일어난다.
아파트나 일반 빌딩에서도 겨우내 얼었던 배관이 터지면서 물바다가 될 때도 있고, 건물의 수축과 이완으로 인해 가스배관이 뒤틀려 가스누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물과 배관이 지나는 모든 곳은 해빙기 취약지점이다.
봄은 집에만 갇혀있던 아이들이 뛰쳐나와 본격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때이므로 미끄럼틀, 그네, 시소, 철봉 등 어린이놀이시설에 대한 점검과 보수도 빼놓을 수 없는 코스다.
꽃샘추위가 언제 다시 영하의 날씨를 몰고 올지 알 수 없으므로 동절기 경계를 무장해제 시켜서도 안 된다.
입주민의 봄 정취 아래엔 관리자의 얼음장 같은 대비태세가 떠받치고 있다.
해빙이란 말은 얼음이 녹는다는 물리적인 뜻이 기본이지만, 정치적인 뜻도 내포돼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상은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및 동유럽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됐다. 이 냉전체제는 1962년 쿠바 미사일사태를 정점으로 극한까지 올라가 3차 대전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태에 다다랐다.
다행히 미국과 소련이 제정신을 차리고 한발씩 물러서면서 해빙기가 찾아왔다. 핵확산금지조약(NPT)과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같은 용어들이 1960년대 말부터 언론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1972년 닉슨 미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데탕트의 도래다.
2018년 3월, 한반도에도 해빙기가 왔다. 꽁꽁 얼었던 얼음이 녹자 남한과 북한 사이에도 봄기운이 감돈다.
이 기운은 이미 2월부터 시작됐다. 시베리아급 한파가 한반도를 강타했던 지난겨울,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평창의 기온은 기막히게 온화했다. 혹한이 올림픽을 망치지나 않을까 전 세계가 걱정했지만, 바람마저 숨죽인 하늘에선 수천 대의 드론쇼가 일사불란하게 펼쳐졌다. 지붕 없는 개막식이란 상식파괴의 모험은 ‘역대 최고’란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불타올랐다.
여기에 남북단일 하키팀은 놀라운 팀워크를 과시하며 뜨거운 감동을 안겨줬고, 북한 예술단과 응원단의 명랑쾌활한 모습은 올림픽의 흥을 더욱 북돋웠다.
이제 곧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전 지구적 관심이 평창에 이어 다시 한 번 한반도에 쏟아지게 된다. 미역국부터 마시며 들뜰 건 아니지만, 냉전시각으로 해빙의 기운을 걷어찰 이유도 없다.
날씨와 함께 여성의 목소리도 뜨거워지고 있다. 사회가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여성 억압과 폭력의 실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이게 진짜 해빙이다.
한반도에도 성평등에도 그리고 공동주택에서도 모든 얼음덩어리를 녹여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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