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이름도 모르는 탤런트 부부의 일상이 낯선 프로그램에서 소개된다. 나는 잠시 화면을 정지시키고 본다. 남자의 배려가 평범하지 않다. 조금 지나자 그 이유가 보인다. 여성이 남성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 같은 인상이다. 이를테면 한 중발의 국물을 번갈아 마시더니 국물이 바닥나자 둘이 ‘쪽’ 소리를 내며 뽀뽀로 마감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흉악스럽지가 않다. 
아내가 여행을 떠나는데 남자가 배웅하러 간다. 둘은 차를 타자마자 여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 손깍지를 낀다. 우리 부부도 손을 잘 잡는 편이라 나는 그 기분을 안다. 당분간 떨어진다는 데 대한 약간의 불안막이가 되고 남편은 아내가 걱정스러운 면도 있다. 중간에 여행 파트너를 태우려고 차를 세웠는데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짐을 잘 드는데 뭘”
“그래도 그렇지.”
“내 여자 아니면 불친절해. 내 여자에게는 감성으로, 남의 여자에게는 이성으로 대하거든.”
아내 친구는 다소 불만스러워서 태클을 건다. 
“야 너 이 남자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니?”
“단순무식한 매력.”
“형은 형 식대로, 나는 내 식으로 사는 거야.”
“그래도 그렇지.”
“사랑하는데 무슨 머리를 써. 사랑하면 되는 거지.”
머뭇거림 없이 발사되는 언어, 지극히 간결한 표현이지만 그 남자는 분명한 자기 생각을 갖고 결혼 생활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직까지 이성과 감성이란 단어를 이렇게 적재적소에 정확히 사용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커닝하고 싶어졌다. 
나는 41세가 되면서 내가 얼마나 남편에게 무덤덤하게 대하고 사는지를 자각했다. 사과 장사가 사과 한 개만 더 줘도 다달이 수고해 벌어다 월급을 통째로 주는 내 남자에게보다 화사하게 웃는 나를 봤다. 그냥 익숙한 내 남편이니까 당연한 듯 사는 거로구나 싶어서 그날로 자세를 바꿨다. 그 바꿈 식은 그달 월급을 받으면서 치렀다. 남편에게 돈 버느라고 수고했다고 말하고 고맙다고 큰 절을 해줬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를 주시해봤다. 내 남자보다 다른 남자에게 더 친절하거나 마음 쓰는 잘못을 하지 않기로 나와 약속을 했다. 나의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 프로그램 출연자를 봤기에 보였을 것이다.  
남편은 퇴직하고서도 이 일 저 일을 곁들이면서 살다가 72세에 이르러 일로부터 손을 뗐으므로 충격은 크지 않았다. 최근 들어 오히려 나에게 변화가 찾아들었다. 조금 무심하거나 남편의 말에 경청하지 않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부부 인연이 언제까지 일지 알 수 없는 세월 속에 살면서  느닷없는 일이 닥쳐서 후회하지 말고 깨달은 순간 자세를 고쳐 살기로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제 나도 커닝을 해 내적 구호를 바꿔 보기로 한다. 
내 남자에게는 감성으로, 다른 남자에게는 이성으로!
말을 맛나게 한 것이 아니라 부부 전선 평화롭기를 구현하고자 수고하는 자세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새롭게 살가운 일이 생각난다. 
나는 결혼하고부터 지금까지 무거운 것을 들지 않았다. 친정에 다녀오면서 들려주는 어머니표 음식물을 무심결에 내가 받아들지만, 집만 빠져나오면 이내 남편이 빼앗아 들었다. 가벼운 비닐 쇼핑주머니도  들어준다고 한다. 여자 손에 무엇인가 들려있고 남자손이 홀가분 한 것은 그림이 보기 좋지 않다는 남편 나름의 지론이다. 그것이 보자기에 싸진 것이든 새끼로 묶은 것이든 개의치 않는다. 자기 아내에게 하는데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묻는다. 그래도 그것이 그다지 멋지거나 인간미가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당연시했다. 그러한 행동의 마음 바탕에는 남편 특유의 변별력 있는 아내 사랑법이었는데 일찍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래도 애써 설명도 하지 않는다. 해주고 싶어서 해주면 그만이라고 말하며 마음을 두지 않는다.   
어느 해에 다른 부부와 함께 해외여행길에서 상대방 아내로부터 비교가 되고 말았다. 상대방 남자는 무겁거나 가볍거나 아내의 손의 무관심인데 내 남편은 속속들이 들 것은 다 챙겨 들었다. 남편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하고 나도 습관적으로 그렇거니 했는데 놀랍게도 다른 여자의 물건은 들어주지 않는다. 그것 또한 철칙이다.
‘자기 여자에게는 감성으로, 남의 여자에게는 이성으로’를 내 남편도 철저히 지키고 살았던가 보다. 그렇게 부부 전선 이상 없이 70을 거뜬히 넘겼다.  
좋은 습관은 그 사람의 인격이 돼서 자신도 모르게 행동한다.  지금은 내가 조금만 무거워도 들 수 없는 신체조건이라 신세를 지는 형편이지만 이제야 비로소 남편의 손길에서 남성미를 본다.    

 

오 정 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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