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도다이지
나라현의 절을 떠올리면 동대사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관광명소다. 사슴들이 뛰노는 사슴공원의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동대사를 볼 수 있다. 기존에 생각하던 규모의 사찰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일 정도로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인 동대사의 규모는 놀랄 만큼 거대하다. 또한 대불의 안쪽에서 는 아주 큰 보살을 만나볼 수 있다. 동대사의 볼거리는 사찰뿐 아니라 그 주변 자연경관도 볼만하다. 꽃과 나무들이 잘 다듬어져 있는 정원은 봄에는 벚꽃이, 가을에는 단풍이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752년 4월 9일 동대사는 고대 한국인들의 손으로 우뚝 일어섰다. 고대 백제인을 주축으로 신라인과 고구려인들이 뜻을 모아 남긴 결실이다. 그 대표적인 성인은 구다라인(백제인) 행기(668~749) 큰스님과 양변(689~773) 큰스님, 신라학승 심상대덕(8세기) 큰스님이다.
이 사찰은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삼았다. 당시 신라인학승에 의해 비로소 화엄경이 일본에 널리 보급돼 도다이지 건설의 바탕이 됐다.
절 입구에서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봤다. ‘아, 아, 아’ 절로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경건하고 숨이 탁 막힐 정도의 감동적인 현실 앞에 나는 옷깃을 여밀 여유조차 없었다.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들이 옛 백제인들의 혼이 깃들여 있는 듯 할 말을 잃어버리게 하고, 세계에서 제일 큰 청동불상 앞에 고개 숙여 합장하고 그 자비로운 모습을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타오르는 향불은 가물가물 비로자나불의 인자한 마음마저 불태울 것 같다.
겨우겨우 양쪽의 협시불까지 보고 와락 피었다 미련처럼 하늘하늘 지고 마는 벚꽃 사이 길로 빠져 나오며 빠른 걸음으로 이불당, 삼불당, 백제 신라 고구려의 각종 고대문서 및 보물이 보관돼 있는 ‘정창원’ 건물로 바쁘게 움직였다.
강물이 흘러가듯 문화도 흘러가는 것이다. 백제의 황제, 백제와 신라의 고승들, 건축가들이 온 정성과 혼신을 다해 세운 이 넓고 큰 가람에 와서 조상의 숨결을 느껴보니 그저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일인들은 이 세계문화유산이 고대 한국인이 세운 위대한 업적임을 결코 인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들은 성심성의껏 그 문화유산을 잘 보존해 왔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무한한 한국인의 긍지를 느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조상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의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의 각오가 샘물처럼 솟아오른다.
본래 이 도다이지가 건조되기 전인 733년경부터 이 터전에 양변승려의 곤슈지(금종사金鐘寺)가 서 있었으며, 심상대덕이 그곳에 와 740년 10월 8일부터 처음으로 화엄경 등을 강설했다. 도다이지의 본존 불상인 비로자나대불이 완성 개안된 것은 752년 4월 9일이며 이때 일단 가람의 건설이 완료된 것으로 본다.
오사카시립대 사학과 나오키 고지로 교수는 심상대덕은 나라의 다이안지(대안사大安寺)에 초청된 신라학승이라고 밝혔다.
양변 스님은 나라 땅에서 백제 스님 의연승정(728년 열반) 문하에서 수학해 큰 승려가 된 분이다. 양변 스님은 당초 나라의 가스가산 기슭에 암자를 짓고 자신의 속명인 ‘금종’을 따서 곤슈지라고 불렀다. 이 곤슈지의 터가 현재 도다이지 경내에 있는 이월당 자리다.
양변 스님이 대안사(다이안지)에 와 있던 신라학승 심상대덕을 모셔다 만든 강원자리는 그 이웃에 있는 지금의 삼월당이다. 심상대덕은 신라부석사 의상대사(625~702)의 제자였다 심상대덕은 화엄종을 펴기 위해 일본 대안사로 건너갔던 학승이다.
심상대덕에 의해 신라 화엄종의 ‘비로자나부처님’이 된 동대사의 거대한 금동불상을 건조한 지도자는 백제인 고승 행기 스님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오사카대 사학과 이노우에 가오루 교수는 ‘쇼무천황(성무왕, 724~749 재위)이 행기 스님에게 비로자나대불을 만드는 데 협조해주길 간청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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