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논어의 마지막 글귀가 불지언 무이지인야(不知言 無以知人也)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관계는 소통이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해 서운한 경우가 있으니 말을 잘 알아들어야 낭패를 당하지 아니한다. 당 현종이 사랑한 양귀비는 말을 잘 알아들어 꽃 중의 꽃인 해어화(解語花)라 했다.
의미 없는 말 한마디에도 상처가 되고 화살이 되고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
관계의 선두주자는 말이다.
관계(關係)의 관(關)은 빗장이요, 관계의 계(係)는 걸림이다.
걸려있는 빗장을 푸는 것이 관계이고 보면, 관계는 연결되는 소통이다.
소통(疏通)의 소(疏)는 트임이요, 소통(疏通)의 통(通)은 통함이다.
트이어 통하는 것이 소통이다.
비상구마저 막혀 있고 잠겨 있어 절규의 재앙이 목욕탕만은 아니다.
오기의 오자병법이 있고, 손무의 손자병법이 있고, 소강절의 예언이 있지만, 관계가 아닌가, 소통이 아닌가.
운명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조차 길을 건너기 전에 좌우를 살핀다고 스티븐 호킹이 말했다. 이쪽과 저쪽과 나와의 관계 때문이다.
공감, 화합, 공유, 사랑은 관계와 소통이다.
살갗을 도려내는 칼바람이 불어도 대륙의 함성처럼 녹색의 봄이 온다.
대지는 잠금을 푸는 관계요, 막힘을 뚫는 소통이다.
관계가 없다면 무슨 화합이 있으며, 무슨 합의가 있을까.
소통이 없다면 무슨 공유가 있으며, 무슨 공감이 있을까.
무술년이다.
거친 말이 없고 막말이 없는 너와 나의 관계였으면 좋겠다.
어진 사람은 말을 참고, 꾸미는 말은 덕을 어지럽힌다고 논어에 있다.
선거 때가 아니더라도 말을 조심하여야 하리라.
화합(和合)이란 글자에는 모두 입(口)이 들어가 있다.  
관계와 소통의 핵심은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맨 앞장을 서나 보다.
흥국사 홍교의 ‘관계’라는 김선태의 시가 떠오른다.

직사각형의 돌들이/ 저렇듯 유연한 반원으로 몸을 구부릴 수 있는 것은/ 이음쇠 하나 없이도 수백 년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받쳐주는 힘,/ 안 보이는 둥근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각형은 원을 꿈꾼다.
그러나 돌들의 관계가 진정 아름다운 것은/ 서로 딱딱한 몸을 부딪쳐야 하는 마찰과/ 아귀가 맞지 않아 때로 살점을 도려내야 하는 아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하중을 지그시 버티는 견딤과/ 그러고도 생기는 고통까지를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에는 불협화음이 있다
여수 흥국사 입구에서 마주친 돌다리 하나/ 오늘도 속세와 절간을 잇는 무지개로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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