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내 인생 60평생이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그러나 제자리걸음의 위대함을 보라.

하나의 씨앗이 무수한 제자리걸음이 있었기에 나무가 되고 숲이 된다.

하나의 꽃씨가 수많은 제자리걸음이 있었기에 동백이 되고 장미가 되고 그 뜨거운 여름날에도 해바라기가 되고 이 차가운 겨울에도 국화가 된다.

자연은 제자리걸음으로 행복해한다. 순천만, 강진만, 서천의 갈대가 제자리에서 축제가 되고, 천관산, 민둥산, 신불산의 억새가 제자리에서 축제가 되질 않던가.

인류가 불행해진 이유가 있다면 제자리걸음이라는 기다림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성급하게 남의 자리를 탐하고 남의 돈을 탐하고 남의 권력을 탐하는 이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상을 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있어 함정이나 덫에 걸리지 말라고 제자리걸음이 있는 모양이다.

제자리걸음은 인내요, 수행의 기간인지도 모른다.

달마의 9년 면벽이 그냥 허송하는 제자리걸음뿐이었겠는가.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에서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주인공 영찬이가 하는 말이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는 거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잠시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다.

태어나서 별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한 번도 별이 있다는 것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재활원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본다.

물리치료라는 어려운 의학으로 힘들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제자리걸음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

제자리걸음이 얼마나 큰 희망인가.

우리가 시선을 돌리면 사랑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다. 그리고 사랑해야 할 시간은 그리 길지도 않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때로는 울며, 때로는 웃다가 가는 인생길은 제자리걸음이다.

달팽이가 아니더라도 세상에 지름길은 없다.

무겁기만 한 이 느린 발걸음이 자기가 지고 있는 이 커다란 집 때문인 것 같아 떨쳐내려 해봐도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 달팽이 뿐이겠는가.

월동준비를 끝낸 김 소장이, 더 올라갈 자리도 없는 관리사무소에서 달팽이의 등짐보다 몇 배나 무거운 큰 아파트를 지고 끙끙대고 있다.

내년 최저임금이 오른다고 좋아만 할 수도 없는 제자리걸음.

제자리걸음 같은 달팽이의 노래다.

 

느리다고 느리다고 누가 말 하나요/ 숨도 안 쉬고 여기까지 왔는데요.

더디다고 더디다고 누가 말 하나요/ 땀을 흘리며 여기까지 왔는데요.

느리고 더뎌도 꾸준히 온 몸으로 가는 걸음

저기 푸르른 잎을 향해 정성으로 가는 걸음.

 

그래요, 제자리걸음은 전진을 위한 워밍업이요, 도약을 향한 시동이다.

제자리에 있는 것들, 모래가 모이면 사막이 되고 물방울이 모이면 무지개가 된다. 크리스마스가 온다고 아이들은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을 위해 아버지는 새벽 길을 나선다.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라 해도, 제자리걸음의 위대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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