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사무소장의 시선
김 호 열 주택관리사
인천 산곡한양7차아파트 관리사무소장
갑이 을에게 굴욕을 주려고 요구하는 것 중 최악은 ‘무릎 꿇어!’다.
필자는 관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이를 당해본 적이 있다. 새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령의 부인이 찾아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느낌으로는 뭔가 어색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그녀는 새로 온 관리소장의 간을 보려고 왔던 거였다.
이곳은 부유층의 주상복합 건물이라서 입주자의 지적 수준이 꽤 높았다. 부인은 초등학교 교장을 정년퇴임한 사람으로서 관리소 일에 관심이 많아 가끔 관리소를 들락거렸다. 필자는 그녀를 잘은 몰랐지만 고민되는 일이 있어 참고나 해보려고 자문을 구하러 그녀 집을 찾아갔다. 그녀는 반가이 맞이하고는 관리소장이 구하는 자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고, 다만 그녀의 성향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을 뿐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찾아왔다. 험악한 표정과 말투로 화를 버럭 내며 왜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느냐면서 무릎 꿇고 빌라고 명령했다. 하얀 대낮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자문을 구하러 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그 부인은 자문을 해준 게 아니라 그렇게 행하라고 명령했던 것이고, 명령을 거역했으니 가만 놔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녀에게 당당히 대적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자리보존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녀는 기세등등하게 초등생을 다루듯 다 큰 어른을 혼냈다. 필자는 이때 입주자를 쓸데없이 접촉하는 것은 바보짓이라는 큰 교훈을 얻었다.
매장에서 점원의 실수로 고객이 화가 나면 시키는 것이 ‘무릎 꿇어!’다.
“무릎 꿇어! 대학은 나왔어?” “넌 내가 누군지나 알아?”
갑질 고객의 논리는 이렇다. 때릴 수 없어 무릎을 꿇렸고, 사회 정의를 위해 그런 것이라고.
때리지는 않고 무릎을 꿇게 했으니 은혜를 베푼 것이고, 그렇게 해야 사회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주장이다. 갑의 입장에서의 사회정의 실현이지만 을의 입장에서는 유치한 ‘갑질’의 광란이다.
이런 더러운 ‘갑질’을 잠깐 정신이 돈 사람의 무의미한 도발로 여기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을은 자존감을 잃고 마음까지 아픈 게 문제다. ‘갑질’이 얼마나 비열한지는 당해본 을만이 안다.
관리비를 낸다는 이유로 ‘갑질’을 정당화하는 입주민이 많다. 자신의 잘못은 안중에 없고 직원의 실수만 탓한다. 직원은 봉급을 위해 노동을 팔 뿐이지, 인격까지 파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월급을 지키기 위해 무릎 꿇는 모욕을 견디는 것도 용기일까?
‘갑질’의 만연은 사회를 좀먹는다. ‘갑질’은 악순환한다.
‘갑질’을 당한 을은 병에게 ‘을질’을 하고 병은 또 정에게 ‘병질’을 하게 된다.
‘갑질’이 ‘을질’을 낳고 ‘을질’이 ‘병질’을 낳고 ‘병질’이 ‘정질’을 낳는 악순환이다.
결국 ‘갑질’은 처음부터 차단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갑질’을 차단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