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 150년 왕버들이 꿈꾸는 주산지


사라진 것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리움으로 남는다

 

협곡으로 이뤄진 폭포를 지나 즐비한 석벽들을 올려다보며 넋을 잃고 걷다 보면 갑자기 산세가 밋밋해지며 넓은 계곡이 나온다. 절경에 취한 눈이 편안한 사선의 풍경을 만나 선경의 꿈에서 깨어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대부분 발길을 돌려 돌아가지만 산자락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조금만 발품을 팔면 산중 분지에 자리 잡은 오지마을을 만난다. 마을 입구에는 통나무집 같은 아담한 분교가 있고 감나무에 기대선 양철지붕의 흙집도 있다. 솔방울과 조개탄을 지피던 난로, 이가 빠진 작은 의자, 꼬질꼬질한 교과서들, 처마 끝에 달린 종, 먼지 쌓인 허름한 풍금. 분교는 1970년 개교해 10년간 78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80년 폐교가 됐다. 이후 20여 년을 주왕산을 찾는 산객들의 휴식처로 이용됐다. 늦가을 비가 내리면 졸졸 흐르던 냇가의 단풍들은 내원마을 산길 어귀에 낙엽으로 곱게 쌓인다. 작은 밭 자락 터에는 하얀 억새꽃이 산중마을의 굴뚝 연기처럼 흔들린다. 지금은 사라진 마을의 풍경이다.
주왕산국립공원 내 전기 없는 마을로 알려진 내원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산 아래에 거주하던 마을 주민들이 계곡으로 피난을 오면서 형성된 마을로 일제강점기 목탄 생산자들의 주거지로 사용됐고, 1976년 주왕산이 국립공원에 편제되면서 주민들 대다수는 아랫마을로 이주하고 2005년에는 6가구 그리고 2007년 3가구마저 폐교와 함께 모두 철거됐다. 전기 없는 호롱불 마을이라는 언론의 보도로 사람들이 찾기 시작한 오지마을은 그렇게 사라졌다.

▲ 대전시의 배경을 보이는 기암

동네가 사라지기 전 그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저녁 무렵 폐교에 딸린 민가에서 산나물 밥상으로 식사를 끝내고 막걸리 한잔에 줄 끊어진 통기타를 쳤다. 그리고 쌀쌀한 날씨에 폐교에 마련된 침낭에서 달게 잠을 잤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돌담 넘어 폐교 터에는 생태문화 휴식공간이 만들어져 그때의 사진만 기억을 더듬게 한다. 거대한 절벽 끝에서 만난 아늑한 산골마을과 백구의 순박한 눈망울의 기억을 쫓아 청송의 주왕산을 다시 찾았다.

 

▲ 웅장한 2단폭포인 용연폭포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삐거덕 대문이 열리며 호수의 왕버들과 멀리 물 위에 떠있는 절이 보인다. 그리고 목탁소리. 일주문에서 보이는 한 칸짜리 절은 그림 같다. 안개가 산허리를 흐르고 바람은 신록은 흔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풍경들은 제목 그대로 계절의 순환 속에 아이, 소년, 청년, 장년의 시절을 대입시켜 인생의 순환을 아름다운 주산지의 사계와 교차시킨다.
주산지는 조선 경종 2년(1721)에 저수지가 완공될 때 자라고 있던 왕버들이 물 속에 갇히게 돼 오늘에 이르렀다. 영화 촬영 이후 많은 사람들이 주산지를 찾은 탓인지 저수지의 물을 가둬 놓아버려 버드나무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10년 전만 해도 30여 그루의 왕버들이 주산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는 10여 그루만 명목을 유지하고 있어 복원사업에 애를 먹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른 봄의 신록. 가을 단풍이 물빛에 흔들리는 풍경. 이른 아침 안개에 쌓인 왕버들의 신비한 자태는 암석, 물, 나무가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풍광을 선보인다. 주산지는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아 2013년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105호로 지정됐다.

▲ 용추포포를 올라가는 석벽의 관문


슬로시티 청송
우리나라 최초로 ‘2015 세계 슬로시티 어워드상’을 수상한 청송은 2017년 5월에는 주왕산을 포함한 ‘청송’이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았다. 유네스코세계지질공원은 세계 33개 국 127곳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도가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받은 뒤 국내에서 두 번째다.
청송은 신성계곡 방호정 부근의 병풍처럼 둘러선 계곡과 ‘하얀 돌이 반짝거리는 개울’이라는 백석탄의 명칭처럼 포트홀(돌개구멍)이 이색적이고, 애추지형의 청송얼음골, 탄산약수인 달기약수탕 등 명소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꽃돌로 불리는 청송 구과상 유문암은 아름다운 색상으로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꽃돌은 꽃무늬를 보이는 암석인 구상암으로 전 세계적으로 100여 군데 정도밖에 산출되지 않고 있다.
청송에는 모두 24개 지질 명소가 있다. 이 중 10개가 주왕산 국립공원 안에 있다. 대전사 뒤편으로 사람의 손가락 모양을 닮은 수직절리로 이뤄진 7개의 봉우리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주왕산을 상징하는 기암으로 대표적 명소다.
선녀탕과 구룡소의 돌개구멍을 흘러 폭포를 이루는 용추폭포, 주왕산의 폭포 중 가장 크고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용연폭포, 급수대, 학소대, 시루봉, 병풍바위, 신선바위가 마치 서로 키를 재듯 협곡의 거대한 바위들은 폭포와 어우러진 절경의 산수를 이루고 있다.
봄이면 주방천을 따라 협곡 사이에 수달래가 피고 가을이면 온갖 단풍들이 기암절벽 위 송림들과 대조를 이룬다.
주왕산국립공원은 세계에서도 손꼽힐 만큼 두꺼운 화산재층으로 구성돼 있고, 주왕계곡 지질탐방로는 노약자나 장애인들도 탐방할 수 있을 만큼 편의시설이 잘 조성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주왕산은 상의리에서 주방천을 따라 대전사를 지나는 절경이 있다면 반대편 주산지가 있는 주산천을 따라 절골의 호젓한 비경을 만나 보는 것도 좋다. 아니면 내친김에 대전사 입구부터 절경을 따라 걷다 내원마을을 거쳐 단풍나무 빽빽한 가메봉삼거리를 지나 절골의 비경을 만난다면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주왕산 국립공원에는 산악인들을 위한 가메봉코스(14㎞)를 비롯해 월외1코스(12.4㎞), 월외2코스(12.2㎞), 주방계곡코스(9.8㎞), 절골코스(13㎞), 주봉코스(8.9㎞)를 통해 주왕산의 아름다움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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