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제자리걸음은 기본적인 다리운동의 하나로 제자리에 선 채 걷는 것처럼 다리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일의 진행상태가 나아가지 않고 그대로 멈추어 있는 답보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물건 값이나 주식이 오르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는 보합상태를 말한다. 사전적인 해석이다.
우리의 일상이 늘 바쁘게 움직여도 답보상태요, 보합상태인 제자리걸음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탓할 사람도 이젠 그만두라는 듯이 마지막 잎새처럼 달력이 한 장 남았다.
취업 안 된 아들이 있고, 시집 안 간 딸이 있고, 퇴원을 못한 아버지가 있다. 모두가 제자리걸음이다.
아랫놈, 윗놈 구멍을 맞추어 조이고 푸는 볼트와 너트가 풀리지도 조이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녹이 슬어가는 연말.
로시난테도, 산초도 없는 돈키호테의 바람은 골목을 감아 돌아 하늘로 치솟는다. 이룩할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는 돈키호테의 바람이 분다.
낮은 자리에서 도시의 높은 빌딩들을 보면 참 바보처럼 살았다는 제자리걸음. 특수 활동비를 생활비로 쓰는 사람도 있는데 아무리 모아도 통장 잔고는 제자리걸음. 
희극에서 가장 어려운 배역은 바보이고, 그 역을 맡은 배우는 바보가 아니라는 세르반테스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12월이다.
송년의 밤을 준비하고 새해 일출의 명소를 예약해도 마음이 허전한 것은 늘 제자리걸음이라는 그놈 때문이다.
이제는 제자리걸음에 대하여 달리 생각해보련다.
혈액이 지나다니는 통로로 우리 몸 구석구석에다 산소와 영양분을 전달하고 노폐물을 이동시키는 혈관. 그 길이만도 지구 둘레의 3배나 되는 12만㎞에 탄력을 유지시켜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제자리걸음.
아직은 전진하지 말고 ‘제자리걸음’을 하라는 군대의 구령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보다.
‘앞으로’라는 말을 위해 정신과 육체를 준비시키고, 적극적인 자세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제자리걸음.
어느 곳에도 가지 않으며 진행 없는 동작으로 기다림, 그리움, 희망을 꿈꾸는 제자리걸음.
12월이다. 정유년이 다 가는데 제자리걸음이라고 상심해하지 말자. 드라마 ‘굿바이 미스터 블랙’의 OST로 배수정의 ‘제자리걸음’이라는 노래를 띄운다.

어둠 속에 머물다/ 다시 빠져나올 수가 없어
닫아놨던 나의 마음/ 조금씩 빛을 있게 해준 게 너인데/ 고마운 너인데
너무나도 두려워서/ 다시 밀어냈는데
머릿속은 온통 니 얼굴/ 지워지지 않아/ 사랑은 뜻대로 안 되는 거니까

제자리걸음만/ 하루 또 하루 반복해 난
너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다시 돌아와 오늘도 너를 기다리는 난
제자리걸음만/ 아파했던 그 상처들/ 길을 만들어줬어
햇살 같은 니가/ 내게로 찾아올 수 있게/ 사랑은 멀리해도 어쩔 수 없나봐

제자리걸음만/ 하루 또 하루 반복해 난
너의 기억에서/벗어날 수 없어/ 다시 돌아와 오늘도 너를 기다리는 난
제자리걸음만 oh/ 폭풍이 몰아치더라도/ 날 잡아주는 니가 있어
길을 비춰줘/ oh oh oh oh

내 발걸음은 너를 향해 가고 있어/ 눈물이 흘러도 오늘도 이렇게
다시 돌아와/ 오늘도 너를 기다리는 난/ 제자리걸음만
oh oh/제자리걸음만

그래, 결국 제자리걸음은 낙담하고 포기하는 순간에도 희망의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자양분이다.
5년 동안이나 얼굴 한 번 내밀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뿌리로만 자라는 대나무씨앗이, 5년을 넘기면서 불과 몇 주 사이에 창공을 찌르는 대나무가 된다.
제자리걸음인 일상이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된다.
제자리걸음은 무한대를 꿈꾸는 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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