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가을도 한참이나 가을이다. 벌써 위쪽의 설악산, 오대산, 치악산, 월악산은 단풍의 절정시기가 끝이 났대나 어쨌대나.
추로여주(秋露如珠)라 가을 이슬은 구슬 같이 아름답고, 국화함우염 풍엽취상홍(菊花含雨艶 楓葉醉霜弘)이라 국화는 비를 머금어 아름답고 단풍은 서리에 취해 붉다고 맹호연이 노랠 한다.
낙엽만 떨어져 날리는 창가에, 내 간장 태우고 내 설움 짜내는 기타는 누가 뜯느냐고 낙엽의 탱고가 빠르게 흐른다.
남도의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간다. 아무튼 눈으로 보는 즐거움과 맛으로 보는 즐거움이 섞여 발길이 참으로 바쁜 요즈음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가을을 둔 것은 신의 한 수라 했던가.
가을은 자비로움의 계절이다. 가진 것을 다 내어놓는 가을이다. 부모 곁을 떠나는 자식들처럼 산도 들도 다 내어 놓고 비워져간다. 밀양이다, 보은이다, 대추를 내어 놓고, 문경이다, 청송이다, 사과를 내어 놓는다. 금산이다, 풍기다, 인삼을 내어 놓고, 진영이다, 창원이다, 단감을 내어 놓는다. 진도의 땅에서는 울금을 내어 놓고, 안동의 땅에서는 생강을 내어 놓는다. 나뭇잎은 단풍으로 온 몸을 내던지고, 갈대도, 억새도 마지막을 향해 온몸을 불태운다. 대자연은 프롤로그의 향연을 펼친다.
조선의 문장가 송순이 노래한다.
십 년을 계획하여 초가삼간을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 청풍(淸風) 한 간 맡겨 두고/ 강산(江山)은 들여놓을 곳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
집안으로 들여 놓을 수 없어 둘러놓고 보아야 할 것들이 절정으로부터 비워져가는 계절, 정점으로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는 계절, 어디에 서리가 내리고 첫얼음이 얼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제서야 꽃을 피우는 국화.
오상고절에 피는 국화 앞에서는 복숭아꽃이라는 도화(桃花)야, 배꽃이라는 이화(梨花)야, 너희들은 꽃인 양도 하지 말라고 송순은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에서 노래했다. 이정보도 삼월동풍 다 지내고 어이하여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느냐고 노랠 했지.
그래서 국화는 사군자에 속하는 모양이다.
온갖 만고풍상을 겪은 우리네 인생이 아마도 찬 서리를 이겨내고 곧은 절개를 지닌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저 국화인가 보다.
‘2017 마산 가고파 국화축제’는 늘 해오던 제1부두가 아니라 마산 어시장 장어거리 앞이 주 무대요, 그 주변의 예술촌이 있는 창동, 문화광장이 있는 오동동 일원으로 분산 개최되었다.
국화가 도시의 한복판을 파고들고, 그 곳곳을 이어주는 45인승 국화열차가 15일이라는 축제기간 동안 30분 간격으로 무료로 운행되고 있다. 셀카투어도 시티투어도 바쁘다.
10월의 마지막 전날 국화테마기획공연 특집으로 나는 ‘낙목한천(落木寒天)’이라는 시의 콘서트로 한 시간 반이 넘도록 낭송을 한다.
이정보도, 송순도, 서정주도 국화 향기에 취하고, 시의 운율이 가고파의 물살을 가른다.
세상이 소란스럽고 요란하여도 영혼을 울리고 가슴을 다독이는 시가 있어 얼마나 좋은가. 가을에는 누구나가 시인이 된다. 이 세상에 가장 위대한 예술이란 바로 우리네 삶이라고 하질 않던가.
시든 꽃잎 위에 엎드려 떨고 있는 애버러지에게 내일 떨어질 나뭇잎 하나가 보다 못해 미리 떨어져 이불 덮어주는 유안진의 ‘자비로움’과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말하는 안도현의 ‘가을엽서’를 띄우고, 소프라노 김지숙이 ‘금발의 제니’와 ‘내 마음의 강물’로 10월의 밤을 물들인다.
어머니들의 관객이 많아 문병란의 ‘불혹의 연가’, 고두현의 ‘늦게 온 소포’, 기형도의 ‘엄마 걱정’으로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돌아가셔서도 바람으로 남아 자식 잘되기를 바라는 조현술의 ‘어머니의 기도’로 두 손을 모우고, 내 삶이 네게 가 닿아 젖은 손 말리기를 바란다는 관세음보살 같은 하순희의 ‘어머니의 설법’을 조용히 속삭여본다. 불경이나 성경이나 어머니의 말씀은 사랑에 있어 동급이 아니겠는가. 바리톤 조승완이 ‘신고산타령’과 ‘오솔레미오’로 국화향기 속으로 파고든다.
그늘과 눈물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정호승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는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를, 너와 나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라고 법정스님의 ‘귀한 인연이기를’, 어떤 사람이 멋진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해안선사의 ‘멋진 사람’을, 늦겨울 남녀 발자국 한 쌍이 올라가 밤나무에 기대어 그 짓을 하는 바람에 여러 날 피울 꽃을 한나절에 다 피워놓고 말았다는 정현종의 ‘좋은 풍경’을, 호주머니가 가볍고 마음이 시린 사람들을 위해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파도치고 바람 부는 날에는 높은 파도를 타지 말고 낮게 낮게 밀물지라는 김종해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를 낭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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