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단풍 구경 다녀왔어요?
사람들은 마치 숙제하듯 집을 나선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잘못 사는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매일 집 옆의 공원에서 나무하고 노는 사람에게는 원거리 여행의 목적이라면 몰라도 ‘단풍 구경’ 이름으로는 찾아가지 않아도 좋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는 성당에서 제천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행사 당일 아침 식사로는 찰밥이 나왔다. 한 사람분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다. 나는 얼른 한 그릇을 반납했다. 아침을 적게 먹는 습관이 들어서 그런다고 걱정 말라고 내줬다. 일상의 습관을 들먹이며 편안하게 내준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고향분들 일곱쌍 부부가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의외로 소식을 하느라고 주의를 기울인다. 순례 중 점심 식사 때도 비빔밥을 적게 담으라고 권했다. 순례준비를 할 때도 간식을 마련하지 말자고 건의를 했다. 저녁 식사로는 버스에서 간단하게 곤드레밥을 비벼먹고 마쳤다.
집에 돌아와서는 자꾸 거울 앞에 서 보면서 옆구리 군살을 집어본다. 그런 다음에는 철봉에 매달린다. 낯선 나를 보면서 생각한다. 나의 무의식이 배가 나오지 못하도록 나를 콘트롤하고 있다. 그 뿐인가. 머리 염색도 했다. 맛있으면 먹고 나중에 한 끼 줄이려던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옷방에서 골프복을 여러 가지 꺼내 놓고 입었다가 벗었다가 한다. 마땅치가 않다. 늘 가족하고만 운동을 해서 새로운 것도 없고 편한 복장 일색이다. 놀랍게도 내가 어디에 중점을 두고 옷을 챙기는가 보니 최대한 날씬하게 보이는데 중점을 둔다.
‘뭐지? 아, 내가 젊게 보이려고 애를 쓰는구나. 누가 관심을 둔다고 그래. 사이즈 맞고 추위 막으면 되는 거지. 편하게 입자 그냥’ 인식개선 완료다.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서기 전에 화장을 하는데 평소와 다르게 하고 있다.  깔끔하게 눈 화장을 하고 젊은이들처럼 입술색은 강조하지 않는다. 화사하지 않아 내 마음에는 덜 들지만 무의식은 끊임없이 그런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간다. 현장에 가서 나는 알았다. 이옷 저옷 입어본 뒤끝이라 일단 평화는 내 몫이 됐지만, 아무리 수고를 해도 내적 열망을 가릴 수 없고 나이도 가릴 수가 없다. 40대는 검정색으로, 50대는 회색으로, 나는 오른쪽 팔은 연보라색, 왼쪽 팔은 연회색 티셔츠를 입었다. 게다가 조끼는 흰색인데 등판은 형형색색의 단풍이 든 산을 닮았다. 젊고 군살이 보이지 않는 젊은이들 속에서 몇 끼를 조심한 덕분에 복부가 울퉁불퉁한 수준은 간신히 면했지만 옷 색깔이 정서적 취향을 드러내고 말았다. 어둡고 무거운 색보다 밝고 환한 색을 입고자 하는 나이의 열망이 옷에 정직하게 반영되고 있다. 어디를 봐도 내 눈에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은 없다.
저들은 미니 치마에 스타킹만 신고 날씬한 몸매를 드러내고 있는데 나는 내복을 입고 무릎 보호 밴드까지 착용했다는 것을 저들이 알기나 할까. 어제까지 시큰거리던 다리가 만반의 준비를 하니 가뿐하다. 은희경의 소설 속에 등장한 남자는 암 판정을 받은 남자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병에 걸린 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더 열심히 거리를 내려고 용을 쓰다가 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맥락을 같이 하는 나의 낯선 노력이 남자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이나 질병이나 젊음이나 정상인과는 다소 동떨어진 입장이 아닌가.   
다시 긴장이 된다. 모두들 엄청 잘 치면 속도를 맞추지 못해서 수시로 공을 들고 뛸 참인데 두어 홀 치고 나니 점점 행복도가 높아만 간다.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네 명이 다 도토리 키 재기 실력이다. 
40대가 내 앞에서 공칠 자세를 갖춘다. 예쁘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가 배를 자꾸 안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중창단에서 고음을 낼 때 배에 힘주듯 바짝 조인다. 말도 안 되는 수고지만 내가 그러고 있다.
그 순간 기억을 더듬어보니 잠깐이지만 밥 한 그릇을 둘이 먹은 일이나 철봉에 수시로 매달리던 일이나, 옷을 몇 번씩 갈아입는 일이나 화장법을 달리 하거나 다 같은 맥락에서 수고를 한 셈이다.
나는 아직 여자인가 보다. 부끄러워서 말을 못할 뿐이지 내적 욕구는 젊고 싶고 아름답고 싶은가보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수시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다. 늘 깨어있으며 수시로 인식개선을 해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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